본문 바로가기
뜰의 기록

호주 워홀 실패기

by 랄라맘맘 2021. 5. 13.

※ 문뜰 작가님께서 구루퉁씨의 아뜰리에에 필진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앞으로 뜰의기록은 문뜰 작가님께서 올리시는 글임을 밝힙니다.

 

나의 워홀 실패기

돌아와도 되고 거기 남아있어도 돼. 어느 쪽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구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에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애써 담담하게 알겠다며 전화를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나고 자란 곳으로부터 83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도시, 그 도시 안에서도 생소한 동네 어귀 단칸방. 돈은 떨어져가고 어디로 가야할지조차 알 수 없는 나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이 마를 무렵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에서 바라본 바깥풍경은 내가 꿈꾸던 호주의 풍경 그대로였다. 끝없이 넓은 하늘, 화창하게 내리쬐는 햇살, 간간이 날아가는 독특한 모습의 새들까지. 콧물을 훌쩍이며 나 지금 호주에 있기는 있구나, 생각했다. 오후 1.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쉐어하우스는 나 홀로 남은 듯 적막했다.

 

일과 여행, 영어공부까지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워킹 홀리데이열풍이 불던 2013, 때마침 유럽여행 자금을 모으기 위해 휴학을 한 나는 호주에서 일하지 않겠냐는 외숙모의 권유로 선뜻 비행기에 올랐다. 시드니나 브리즈번과 같이 번화한 도시가 아니라 곧장 캔버라로 온 이유도 친척이 여기에 산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십여 년 만에 만난 외숙모는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만큼 변해있었고, 마냥 어리기만 하던 사촌동생은 어느덧 열아홉 살이 되어있었다. 당시 외삼촌은 용접기술을 배워 호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상황이어서 집에서는 외숙모와 사촌동생,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이 함께 살게 되었다.

캔버라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도시라기보다 수도로 정해진 후 발달한 도시로 관공서가 모여 있는, 말하자면 우리나라의 세종시와 같은 곳이었다. 당연히 일자리는 다른 도시보다 적었지만 경쟁은 별로 치열하지 않았다.

나는 이 도시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길을 물어보면 건물 앞까지 데려다주고, 내가 길을 잘못 들면 멀리서 달려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라고 말해주는 호주사람들의 친절과 여유를 느끼면서 나는 이 도시가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정착한지 열흘 만에 일자리까지 순조롭게 구하면서 나의 일상은 아무런 문제없이 흘러갔다.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외숙모와의 관계였다. 공간을 공유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나도 일을 하고 있었고 외숙모도 밤에 일을 하고 있어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여기서 계속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가서 정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금을 모으기로 했다.

사실 그 무렵 나는 외숙모와의 관계보다 일하는 곳에서 만난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일주일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친구들이니 친해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나보다 앞서 캔버라에 와서 일을 시작한 언니와 동생들의 존재는 타지 생활을 처음 하는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여러 친구들 중에서도 L은 특히 나와 마음이 잘 맞았다. 내 휴대폰에 유일하게 연락처가 저장되어있는 친구는 L, 하나뿐이었다. L은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차분하고 생각이 깊었다. 가게에서 일한 첫날, 호주의 화폐가 눈에 익지 않아 헤매는 나를 L이 도와주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그렇게 알게 된 우리 둘은 퇴근 후엔 함께 정류장으로 걸어가고, 때때로 펍에서 맥주를 마셨다. 정말인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딱 하나, 외숙모만 빼고.

2주간 함께 살며 쌓인 나에 대한 외숙모의 불만은 어느 날 갑자기 터져 나왔다. 격앙된 외숙모는 결국 나를 밤거리로 내몰았다. 짐을 챙기며 나는 L에게 방 하나만 구해달라는 문자를 남겼다. L이 일하는 중이면 어떡하지?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이 시간에 내가 도움을 구할 사람은 L뿐이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답장을 기다렸다. 너무 갑작스럽고 막막해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돈을 싹싹 긁어 근처에 백패커라도 가야하나 싶었을 때, L에게서 전화가 왔다. L은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고 자기가 사는 쉐어하우스 주인이 빈방을 빌려준다고 하니 이쪽으로 오라고 말했다. 받아 적은 주소를 꼭 쥐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나는 내가 나고 자란 곳으로부터 83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낯선 도시, 그 도시 안에서도 생소한 동네 어귀 단칸방에 앉아있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적막을 깨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L이었다. 시내 스시집에서 서빙 일을 하는 L이 팔지 못하고 남은 도시락을 내 것까지 챙겨와 주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쉐어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풀려 거의 반쯤 울면서 L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잠든 게 다였다. 1층에 있는 식탁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L은 그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과 자기가 본 여러 워홀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결정은 언니 몫이지만 그래도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L은 주변 상점의 위치를 알려주고 저녁 일을 하러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고 갈팡질팡하느라 가게에 휴가 신청을 낸 참이었다. 또다시 방에 앉아 생각, 또 생각.

L이 들려준 이야기의 요지는 간단했다. ‘워홀 와서 돈 500만원을 모으는 것? 네가 원어민 수준의 영어 능력자거나, 쓰리잡을 뛰면 가능할지도.’ 계산을 해보니 여기서 지내려면 지금 급여에서 거의 남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쓰리잡을? 투잡이면 몰라도 쓰리잡까지 뛰고 싶지는 않았다.

퇴근하고 돌아온 L의 노트북으로 시드니에서 서울까지 가는 편도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다음 날 L은 캔버라에서 시드니까지 가는 버스터미널로 나를 데려가주었다. 근처 카페에서 버스 시간을 기다리며 커피를 마셨다. 우리는 처음으로 한국에서의 서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에 오면 연락 달라는, 어쩌면 상투적일지 모르는 말 속에 진심을 담아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 서로 손을 흔들면서.

L이 내게 베풀어준 것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친절이나 배려 같은 말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한 마음이었다. 긴 터널을 지나느라 바깥이 온통 깜깜해지자 L을 만난 것이 아주 오래전의 일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작 3주인데. 한 달도 채우지 못한 채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실패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실패 같았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때 그랬더라면, 곱씹게 되고 나를 2년간 볼 수 없을 거라 동네방네 알려둔 탓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설명하려해도 팩트는 워홀 갔다가 한달만에 귀국, 그것이었다.

 

새벽 비행기라 시드니 시내를 좀 둘러보고 와도 됐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공항 대기실에서 쪽잠을 자며 아침을 기다렸다. 익숙한 말들이 조금씩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귀국했다.

나의 워킹홀리데이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이유야 어쨌든 워홀러로서는 완전히 실패. 반박할 여지조차 없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그 후로 나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그날 그곳을 떠올린다. 시드니 공항에서 외투를 덮고 애써 잠을 청하던 그때, 코끝이 시리고 배가 고팠던 그때.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때 나는 아주 조금,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게 호주는 오페라하우스도, 코알라도 아니다. 그런 것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내게 호주는 인적 드문 곳에 내리는 나에게 이곳에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준 버스 기사의, 면접을 보러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행운을 빌어준 할아버지의, 친해진지 한 달도 되지 않은 나를 진심으로 도와준 L의 얼굴이다. 그것이 내가 호주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