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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퉁의 기록/구루퉁의 일러스트

아내를 위한 그림

by 구루퉁 2021. 2. 18.

 

 아내는 펭귄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펭귄핏의 어떤 형태를 좋아한다고 해야할까. 
둥글둥글하고 복슬복슬하고 짜리몽땅하면서 왠지 댕청한 느낌의 무엇이라면 다 좋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아내에게 펭귄 그림을 선물하고는 했다. 아내는 내가 선물한 팽귄 그림들을 액자에 걸어두기도 하고 엽서처럼 냉장고 한켠에 붙여두기도 한다. 그럼 괜히 나도 뿌듯해져서 더 열심히 아내에게 선물해주곤 하는데, 어제는 아내가 이유없이 힘들고 우울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팽귄을 그려 선물했다. 아내는 내가 팽귄을 그리는 동안 옆에서 누워 조잘댄다. 팽귄이 얼음 위에 서있으면 좋겠어, 얼음은 바다 위에 떠다니는거야, 얼음 위에 깃발을 달아주면 좋을 것 같아, 하고 말이다. 나는 아내가 원하는대로 그림을 그려준다. 조잘대던 아내는 어느새 우울한 감정을 까먹곤 한다. "휴~ 말을 좀 많이 하니까 좀 풀린 것 같아." 사실 대화를 많이 하다보면 해소되는 감정들이다. 

 아내가 먼저 귀촌을 하자 했기에 죄책감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직장에 나가면 프리랜서인 아내는 홀로 집안일과 자신의 과업을 해나가는데 말 상대라곤 후추와 율무, 이번에 가족이 된 솔랑이 뿐이다. 대답없는 메아리가 계속되다 보면 얼마나 우울할까, 걱정이 드는 것이다. "OO이랑 스피커폰으로 전화통화를 하면서 일을 해봐." 무제한 통화 요금제니까 부담 없이 친구들하고 전화를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해보라고 조언도 해주고 나름 신경을 써본다.

 어떤 날은 아내가 하루 종일 침대에 있었다고 한 적도 있다. 그런 아내를 밖으로 끄집어 내는 것은 언제나 율무다. 하얀 털복숭이가 침대 위에 올라와 산책을 가자고 떼를 쓴다. 못이기는척 아내는 후추와 율무를 데리고 동네를 한 바퀴를 돌고 오면 침대 밖으로 탈출해서 일상을 영위할 힘을 얻고는 한단다. 이 작고 귀여운 똥싸개들의 쓸모다. 율무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서 매일 산책을 가자고 졸라댄다.

 이렇게 죽을 수도 없고, 계속 이렇게 살 수도 없을 때 서른이 온다고 했던가. 서른이 된 아내에게 후추와 율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리고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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