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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11 산책이라고 함은

by 구루퉁 2023. 1. 18.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11화
- 산책이라고 함은

Feat.가을방학

  시골에 온 지 한 달 남짓, 공간도 삶도 자연스 정돈이 됐다. 대문 옆 벽에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문패 세 개를 달고, 마당에 빨랫줄을 치고, 못 쓰는 나무판과 플라스틱 박스를 이용해서 옥상에 앉을자리를 만들면서 우리가 꿈꾸던 모습의 집으로 꾸며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동안 정해진 것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옥상에 올라가 마을 풍경을 보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마시고 싶은 차를 마시며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었더니 그 안에서 나름의 규칙들이 생겨나 일상을 자아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알람 삼아 일어나 집 안의 문을 모두 열어둔 채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는 일. 강아지들이 마당과 집 안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아랫부분이 뜯어진 방충 문을 닫아두고 초록빛 잔디를 바라보며 오늘의 세상을 지켜보는 일. 맑은 날에는 빨래나 이불을 말리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들으며 오늘에 맞는 노래를 고르는 일. 하늘과 구름, 한적한 골목의 풍경을 보며 처마에 매달아둔 풍경소리를 듣는 일.     

  이 모든 소소한 일들이 작지만 충만하게, 일상을 채워갔다.     

  그중에서도 우리 일상을 가장 다채롭게 물들여준 것은 산책이었다. 맑은 날 아침에 일어나 과일이나 채소로 가볍게 허기를 달래고 나면 산책하기 꼭 알맞은 시간이 되어서 집에 있는 옷을 집히는 대로 꿰어 입고 강아지들을 앞세워 집을 나섰다.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얽매인 데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갈 것.

  누굴 만난다든지 어딜 들른다든지 별렀던 일 없이 줄을 끌러 놓고 가야만 하는 것.’*     

 

  어쩐지 봄만 되면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처럼, 우리의 시골 산책이 그랬다. 출발점에서 도착점에 닿기까지의 과정으로 시작과 끝이 분명했던 도시에서의 산책과 달리 시골에서의 산책은 나를 둘러싼 세계와 마주하며 계절을 느끼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가장 나다운' 시간이었다. 산책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남편과 여러 가지 주제로 대화를 하기도 하면서 나는 '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은 것'이라던 어느 시인의 시를 떠올렸다.

산책을 다녔던 마을 중앙길

   정해진 곳 없이, 해야 할 일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면 순간순간이 여행이었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따라가니 다른 마을이 나오기도 했고, 샛길을 따라 걷다가 외딴곳에 지어진 그림 같은 교회를 보기도 했다. 마음이 변하면 도중에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주는 안도가 꽤 컸다. 내킬 때마다 마을에 난 길 여기저기를 다니며 우리는 어떤 여행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과수원과 논밭을 끼고 걸으며 주민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작물들이 조금씩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말소리를 들으며 작물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천천히 자라났다. 우리들의 이야기도 바람에 실려 과실 속에 차오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복숭아와 포도를 먹을 수 있는 여름이 손꼽아 기다려졌다.

  요정이 살 것 같은 토끼풀 밭, 마을 초입에 서 있는 ‘절대 감속’ 표지판, 우리들의 산책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이웃 강아지 나루……. 이곳의 풍경들이 겹겹이 쌓여가며 우리가 마을 풍경의 일부로 녹아드는 사이에도 시골에서는 연일 축제가 벌어졌다. 한 해를 돌아 제 계절을 만난 꽃들의 향연이었다.

  노란 꽃, 하얀 꽃, 보라 꽃, 날마다 다른 꽃이 길 따라 담 따라 피어났다. 5월 중순에 접어들 무렵에는 붉디붉은 꽃잎으로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한 목에 사로잡는 양귀비꽃이 마을 곳곳을 수놓았다.  

마을에서 볼 수 있었던 양귀비

  양귀비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강렬한 자태로 초록 풀들 틈에 서 있었다. 양귀비꽃을 가까이서 뜯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도시에도 이 즈음 양귀비가 피어났을지 모르지만 결코 잠들지 않는 네온사인, 흙 한 줌 찾아보기 어려운 아스팔트 도로, 발 디딘 땅조차 내려다볼 수 없게 높이 솟은 건물이 늘어선 도시에서 꽃과 풀의 자취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도시에서 꽃이 잘 조성된 어떤 장소에 가야지만 볼 수 있는 인공적인 존재였다면, 시골에서 꽃은 자연 그 자체였다.

  눈 돌리면 어디에나,

  길, 마당, 돌 틈, 강변할 것 없이 어디에나 꽃이 폈다.

  장소마다 다른 꽃이, 시기마다 다른 꽃이 폈다. 산책을 하다 길고양이나 고라니를 만나기도 했다. 꽃이 계절의 이름이 될 수 있는 곳에서 나를 둘러싼 낯선 존재들과 시선을 맞추며 나는 아이처럼 매일 새롭게 설렜다.

  그리하여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 잘한 일인가 하면 아직까지는 그랬다.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나는 내일을 기다렸다.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하늘은 하루도 없었고, 아직 세상은 내가 모르는 일들로 가득했으며, 문만 열어젖히면 파란 하늘과 짙푸른 산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안온한 삶이 너무도 행복해서

  문득문득 이런 삶을 오래 지속할 수 있을지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아무렴,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할 리가 없었다.

  불안을 습관처럼 달고 사는 나는 이곳에서의 삶을 오래도록 지속하려면 더 잘 쓰고, 많이 쓰고, 재미있게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마음에 잠시간 마음이 무거웠으나

  한편으로 또 그만큼 눈 깜짝할 사이 변할 수 있는 사람인 나는,

  이내 어쩌면 사실은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덜 가지고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으면 덜 소비하고 더 많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냥 지금 이대로만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이곳에서 지내는 한 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생각한 내게 그렇다면 그렇게 살면 그만이라고 서울에서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던 그 마음이 말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시골에서의 삶을 즐기자,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내 몫의 밥벌이를 하자,

  문제가 생기면 그건 그때의 나에게 미뤄두자.

  그렇게 마음먹자 마음이 한결 가뿐했다.

  철이 들지 않은 거래도, 세상 물정을 모른대도 좋았다. 이곳에 온 것이 잘못된 선택이면 어떻고 이 모든 게 내 착각이요, 패착이면 또 어떨까. 한 평생을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면 그만한 삶도 없을 터였다.

신이난 율무(좌)와 후추(우)

 어차피 인생은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찬란한 봄빛 아래, 모든 것이 알맞게 따스한 곳. 나도 모르게 여기에 어울리는 노래를 나직이 불러보다.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속에서  ‘그늘진 심정에 불 질러’** 여기까지 온 나는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가을방학의 노래를 몇 번이고 흥얼거렸다.

마을 초입의 '절대감속' 표지판. 산책을 할 때마다 표지판 위 거울 앞에서 우리 모습을 들여다보며 과연 우리는 얼마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 해당 표현은 '가을방학'의 노래 <속아도 꿈결>의 가사를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 이 표현은 '가을방학'의 노래 속에 등장하는 이상의 <봉별기>의 한 구절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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