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10화
- '농.알.못' 부부의 농사 첫걸음
Feat.황간면 농사 마스터, 옆집 할머니
밭에 뭔가를 심으려면 잡초를 뽑아야 하니 뽑기는 했다만 사실 우리는 텃밭 가꾸기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내내 도시에서 살며 시골과는 인연이 없었던 터라 우리가 아는 것은 그냥 흙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면 무언가 자란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뿐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기도 하고 책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결국 농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의 기후와 날씨, 토양이었다. 작물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는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어도 무엇이 잘 자라는지, 언제쯤 심고 거두어야 하는지는 농사를 짓고자 하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달랐다.
일단 마을 사람들이 어떤 작물을 심었는지 궁금해 집을 나섰지만 '농.알.못(농사를 알지 못함)'인 우리는 텃밭에 정갈하게 심긴 작물들을 보고도 무엇이 무엇인지 제대로 구분해내기가 어려웠다. 열매라도 달려있으면 알아보기가 비교적 쉬웠지만, 그렇지 않고 잎과 줄기만 있는 작물들은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오며 가며 몇 번 마주친 옆집 할머니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우리 집 대문을 나서면 바로 옆에 위치한 집에 사시는 할머니께서는 우리가 처음 집을 보러 온 날부터 ‘집 보러 왔어요?’ 라며 먼저 말을 걸어주신 분이었다. 게다가 한참 어린 우리에게도 말을 놓지 않으시고, 온화한 말씨로 부부가 살기 좋을 거라는 말씀을 해주신 사려 깊은 분이시기도 했다.
할머니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나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귀농귀촌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 접한 터라 시골 어른들이라면 왠지 타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고, 때때로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하며, 심한 경우 무리한 요구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나였는데, 할머니를 만난 후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이다.
이사 온 다음 날, 온 마을에 떡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한 골목을 끼고 사는 이웃에게는 뭐라도 드리고 싶다는 마음에 우리 부부는 할머니 댁과 그 옆의 할아버지 댁에 과일과 음료를 들고 가서 인사를 드렸다. 어르신들은 모두 부담스러워하시면서도 잘 먹겠다며 작은 성의를 받아주셨다.
이 날의 방문으로 우리는 할머니 댁에는 몸이 조금 불편하신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골목 초입에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의 손자와 남편의 나이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지만 골목을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 마을의 일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담스럽게 뭐 이런 걸 다 가져왔어요’하고 손사래를 치시던 할머니께서 다음 날 밭에서 직접 기르신 시금치와 상추를 닮은 이름 모를 채소를 한 바구니 가져다주시기도 했다. 도시에서 한 번도 시금치를 내 손으로 사보지 않은 나였지만, 할머니께서 손수 지으신 시금치를 받은 나는 한 줄기의 시금치도 허투루 버리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며칠간 시금치 요리법 찾기에 몰두했고, 우리 부부는 한동안 다양한 시금치 요리를 먹으며 시금치의 참맛을 깨달아갔다. (그중 하나가 바로 다리 많은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인 닭가슴살 시금치 토스트였다.)
여러 날을 지켜보니 할머니께서는 대체로 이른 아침과 점심시간이 지난 후, 저녁 직전-이렇게 하루 세 번 정도 텃밭을 오가셨다. 멀찍이서 할머니의 텃밭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작물들이 질서 정연하고 정갈하게 줄지어 자라고 있었다. 우리 집 바로 앞에는 할머니가 가꾸는 호박 덩굴이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마을의 다른 밭과 비교해도 할머니의 텃밭은 독보적이었다. 밭의 구획은 잘 나누어져 있었고, 작물들은 시들하거나 맥 없는 기색 없이 싱싱했다. 농.알.못인 우리 눈에 매일 같이 부지런히 밭을 오가시며 작물을 돌보는 할머니의 모습은 '황간면 농사 마스터'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래, 할머니께 부탁을 해보자. 그렇게 결심한 우리는 집 앞에서 밭을 일구시다 집으로 돌아가는 할머니께 달려가 텃밭 농사를 지어보고 싶은데 혹시 도움을 주실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할머니께서는 흔쾌히 그러마하시며 먼저 ‘밭을 조사(?)놓으라’고 말씀하셨다. ‘조사 놓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뉘앙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도 밭을 갈아엎어 놓으라는 의미 같았다.
텃밭 한 구석을 마저 정리해두자 할머니께서 직접 씨앗을 가지고 우리 집에 와주셨다. 몸이 조금 불편하신 할아버지께서도 함께 오셔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셨다. 할머니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갈아놓은 밭 한쪽에 흙을 두둑하게 쌓아 이랑을 만드셨다. 우리도 할머니를 따라 한 줄로 흙을 쌓았다.
할머니가 작년에 직접 받아두셨다는 상추 씨앗과 시금치 씨앗을 텃밭 한 이랑에 솔솔 뿌린 뒤 흙을 살짝 덮어주었다. 기다란 호스를 끌어와 물도 뿌려주었다. 할머니께서는 이걸로 일단 다 됐다며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에 한 번씩 물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대접한 매실차를 드시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셨다.
옆집 할머니와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농사의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대단한 걸 심은 것도 아니고 단지 상추와 시금치를 심은 것뿐이었지만 우리는 우리 손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기분에 충만감을 느꼈다. 이제 막 텃밭에 입문한 초짜 농사꾼에 불과했으나 땅을 밟고 손으로 흙을 만지며 삶을 위한 노동을 하는 기분, 어쩌면 이런 기분이야말로 사람의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마음에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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