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12화
- 지금은 농사 중
마음만은 벌써 풍년
빈 땅이 여백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상추 싹이 채 올라오기도 전이었다. 무언가를 심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뿌듯해진 나는 아무것도 심지 않은 빈 텃밭을 보며 저 광활한(?) 땅에 무엇이든 심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손바닥만 한 자투리땅이라도 허투루 놀리지 않는 이웃들을 보며 이곳의 삶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던 우리가 이렇게나 빨리 텃밭농사에 뛰어들게 될 줄이야, 정말 사람 일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2일/7일마다 열리는 황간면의 장이나 4일/9일에 열리는 영동군 장에 가서 그 계절에 심기 알맞은 씨앗이나 모종을 구했다. 포트마다 붙은 이름을 보고 우리가 먹고 싶은 채소, 종종 쓰지만 잘 사지는 않는 채소를 위주로 모종을 고른 뒤 상인들의 추천을 받아 손이 많이 가지 않는 채소 몇 가지를 추가로 구매했다.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구석에서 ‘딸기’라고 적힌 모종 포트를 발견한 나는 내 손으로 직접 키워 먹어보고 싶다는 포부로 딸기 모종 하나를 달랑 사기도 했다. 딸기 모종은 한 개에 천 원으로 생각보다 비싼 편이었지만, 싹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콤달콤한 딸기향이 절로 떠올라 나는 끝끝내 딸기 모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딸기는 하우스를 지어주어야 할 텐데, 하시면서도 잘 키워보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모종 한 판, 두 판을 사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세 개씩 다섯 개씩 몇 백 원 단위로 모종을 사며 그 누구보다 넉넉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청경채, 고추, 방울토마토, 호박, 오이 모종 몇 개를 싣고 돌아오는 길, 마음만큼은 벌써 풍년이었다.
모종을 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이랑에 뿌리가 들어갈 만큼의 깊이로 구멍을 뚫어 포트에서 꺼낸 모종을 나란히 심어주고, 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흙을 덮어준 뒤, 땅을 단단히 다져 물을 주면 그만이었다. 작고 연약해 보이는 싹이 텃밭에 잘 뿌리를 내려줄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모종이 몇 개 없으니 옮겨심기는 생각보다 금방 끝이 났지만 우리는 오래도록 텃밭을 떠나지 못했다.
모종을 옮겨 심고 대파 뿌리까지 심어둔 후부터는 날씨를 살피는 것이 일이 되었다. 그 전에는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무심했지만 노지에 채소를 심은 뒤에는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오지 않으면 오지 않는 대로 마음이 쓰였다. 변화무쌍한 날씨에 맞추어 작물들의 상태를 살피고 수시로 조치를 해줘야 하니 시골 어른들이 날씨로 한 계절을 기억하시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때에는 우리 마음도 타들어가는 듯 안타까웠고, 가는 비라도 잠깐 내리는 날에는 빗방울이 달게만 느껴졌다. ‘가뭄에 단비’라는 의미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 쓴 만큼 자라는 작물들을 둘러보고 있으면 그동안 내가 먹었던 채소들, 다 누군가의 정성으로 나에게 온 것이겠구나 싶어 새삼 마음이 따뜻해졌다. 연약하게만 보이던 싹이 땅에 자리를 잡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것을 보며 초보 농사꾼인 우리의 보람도 무르익었다.
그중에서도 청경채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손바닥 반 만 한 크기일 때 심은 청경채가 어느새 한 손에 다 쥐어지지 않을 만큼 자라난 것을 보며 땅이라는 거, 정말 쉬지 않고 무언가를 키워내는구나 실감했다.
쉼 없이 생명을 길러내는 저 땅처럼, 내 마음이라는 텃밭도 쉼 없이 행복을 키워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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