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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13 끼니,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

by 구루퉁 2023. 1. 20.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13화
- 끼니,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

종속영양 생물의 숙명을 넘어

  말하자면 나는 ‘종속영양 생물’이다.

  혼자 힘으로 유기물질을 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주변에서 유기물질을 섭취하는 생물.

  그렇기에 스스로 유기물질을 합성하는 식물과 달리 종속영양 생물에 속하는 나는 돌아오는 끼니를 맞아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다. 먹지 않으면 죽는, 이 지구 상의 모든 동물과 같은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잊지 않고 꾸준히 외부로부터 영양을 섭취해왔기 때문이다. 꿈이 있기 때문, 이라거나 내 몫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배가 고팠으므로 먹었고, 먹었으므로 살았고, 살았으니 기왕이면 행복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내가 살아온 시간만큼 수없이 많은 끼니들이 내 앞에 차려졌다.

  그 끼니들이 나를 만들었고 끼니로 인해 살아왔으나 내 손으로 끼니를 차려 먹은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매 끼마다 차려지는 밥상이 호사인 줄도 몰랐던 어린 시절, 나는 먹는다는 것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었는데 사실 없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냉장고에는 늘 먹을 것이 있었고 자주 먹고 싶은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는 엄마 덕에 부족함 없이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며 자란 나였다.     

  아침밥을 먹고 가라는 엄마의 말이 그저 귀찮기만 했던 그때, 내게 끼니는 집에서, 학교에서 때가 되면 ‘뚝딱’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내게 끼니는 맛이 있고 없고 외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먹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매번 돌아오는 끼니에 대해서도 당연히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오늘 점심은 뭘까, 딱 그 정도 수준의 생각뿐. 그러니까 나는 종속영양 생물임에도 그 사실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온 셈이었다.     

  내가 종속영양 생물임을 뼈저리게 느낀 것은 대학 때,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내 손으로 차려먹지 않으면 아무도 내 끼니를 대신 책임져주지 않는 현실과 마주하면서 나는 살아가기 위해 서툴게,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금방 포기하고 학교 식당이나 값싼 대학가 식당에서 해결했지만 그 시절 끼니는 보이지 않는 적이었다. 먹으면 그때뿐 끼니는 계속 돌아왔고 지금 두 배로 먹는다고 해서 다음 끼니까지 해결되지는 않았다. 과제나 시험으로 한창 바쁜데 끼니까지 발목을 물고 늘어지면 먹는다기보다 그야말로 때운다, 는 느낌으로 한 끼 한 끼를 해치우기 바빴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는 피할 수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 새 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는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도 조준되지 않았다.’는 <칼의 노래> 한 대목이 그때만큼 절절히 와 닿은 적이 없었다.   

  살자고 먹는 끼니가 죽자고 달려드는 짐승 같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제 몫의 끼니를 의연히 챙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전장 밖에서도 끼니는 꼬박꼬박 돌아왔다. 아니,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이미 저마다의 전선 일지 몰랐다. 살기 위해 끼니가 필요하고 끼니를 위해서 노동해야 하는 종속영양 생물의 숙명이 때때로 서글펐다.

      광합성을 해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배고픔 앞에 하던 일을 내려놓아야 할 필요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일해야 할 이유도 없을 텐데.     

  그렇게 먹는 일을 대충 하다가도 불현듯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거나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을 때는 먹는 일에 집착하며 먹고 또 먹었다. 내게 있어 먹는 일은 그야말로 양극단이었다. 죽지 않기 위해 먹거나, 죽고 싶어서 먹거나.

  도시에 머무는 내내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람은 닥쳐오는 끼니 앞에 한없이 작았고 무엇을 먹었는지는 무엇을 먹을지 앞에서 무력했다. 끼니를 챙기는 일은 내 몫의 외로움을 달래는 일과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결국 삶이란 수없이 밀려오는 끼니 혹은 외로움 같은 것을 해결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유기농을 빙자한 귀차니즘으로 텃밭을 성실히 돌보지 못했지만 기특하게 자라준 청경채. 벌레들이 다 뜯어먹기 전에 수확해 볶음요리를 만들었다.

  사는 곳을 바꾸고 복잡한 삶에서 몇 가지를 덜어낸 후에야 나는 매 때마다 달려드는 끼니를 조금쯤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까닭 없이 분주했던 서울의 삶과 다르게 시골에서는 하루가 이렇게 길었나 싶을 만큼 시간이 많은 덕분이었다. 자연히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여유도 생겼고 생각한 것을 만들어먹을 만큼의 여력도 있었다.     

  게다가 철마다 그 계절의 작물들을 선보이는 시장과 틈틈이 밭과 집을 오가시며 우리 집 담장으로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나눠주신 옆집 할머니가 있어 나는 영원한 골칫거리인 끼니를 조금씩 즐겁게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고추며 토마토, 호박 따위를 텃밭에 조금 심고 나서는 더더욱 먹을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냉장고를 열어보거나 텃밭을 둘러보며 가장 많이 있는 재료를 떨어낼 먹을 수 있는 요리법을 찾으면 그만이었다.     

  깻잎이 많은 날에는 깻잎을 잘게 썰어 주먹밥을 만들어 먹었고, 할머니께서 한아름 두 봉지 가득 시금치를 안겨주신 날에는 파스타며 샐러드, 각종 요리에 시금치를 지지고 볶아 넣어 먹었다. 여러 가지 채소가 많이 남으면 잘게 썰어 한데 모아 먹었다. 냉장고를 뒤져 쓸만한 재료를 찾아내고 여러 요리법을 적당히 응용하면 제법 훌륭한 한 끼가 만들어졌다. 오로지 그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맛과 향이었다.

  이렇게 내 손으로 끼니를 만들어먹으면서 나는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내 손으로 차려먹는 끼니는 매 끼 닥쳐오는 배고픔을 적당히 '처리'하거나 손쉽게 '때우는' 방식이 아니라 수시로 싱싱한 과일과 채소의 향과 질감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다가올 배고픔을 기다릴 수 있게 해주었다. 내 몫의 끼니를 준비하며 기다릴 때 나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종속영양 생물의 슬픈 숙명에서 벗어나 잘 먹기 위해 살아가는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

  냉장고를 비워 배를 채울 때마다 인간으로서 한 뼘 한 뼘 성장해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끼니는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귀찮고 성가신 시간에서 삶의 기쁨을 깨닫게 해주는 즐겁고 충만한 시간으로 바뀌어갔다. 손을 움직여 요리를 하는 동안에는 외롭다는 생각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끼니가 종속영양 생물이 스스로를 위해 여는 생의 축제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종속영양 생물이지만, 그렇기에 씹고 먹는 즐거움을 알 수 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외로운 인간이지만, 그렇기에 둘이 함께 하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세상만사 따지고 보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는 것이 다만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짓도 없을 터였다. 나를 만드는 끼니에 조금 더 정성을 기울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눠 먹을 끼니를 만드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일일지 몰랐다.

  자격증이나 학위, 각종 증명서와 상장들이 인간으로서의 내 가치를 말한다고 믿었던 날들이 있었다. 먹고 마시는 노동의 영역을 거의 온전히 타인에게 맡겨둔 채 재화로 교환하며, 끼니를 만드는 노동에 드는 시간을 아끼면 더욱 가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능력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을 음식을 요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내게 그것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입에 맞는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요리해 먹는 어느 저녁 문득 깨달은 나는

  이런 끼니를 가능한 한 오래도록 함께 맞고 싶다고,
  그리하여 조금 더 행복한 나와 당신이 되고 싶다고, 진심을 다해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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