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15화
- 길을 깔아보셨나요?
내가 까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꽤 자주, 남편의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말을 걸어도, 어깨를 주물러줘도 어딘지 모르게 멍한 상태가 길게 이어지면 슬그머니 불안한 마음이 든다.
'분명 머릿속으로 뭔가 생각하는 거야.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지?'
아침을 먹고 두 사람의 시선이 나란히 마당으로 향해있던 어느 날 - 길을 깔자, 고 남편이 말했다. 산책을 가자, 거나 빨래를 널자, 는 말처럼 아무렇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좋지, 하고 대답할 뻔했다.
길을 깔자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길이 필요할 만큼 땅이 험한 것도 아니고, 길이 없어서 불편한 것도 아닌데. 말없이 마당과 남편을 번갈아 쳐다보는 내게 남편은 대문에서부터 우리 집 현관문 앞 계단까지 돌을 깔아 길을 만들면 예쁠 것 같다며 눈을 빛냈다.
큰일이었다. 남편이 저렇게 눈을 빛낼 때에는 웬만해서는 말릴 수 없었다. 내가 거들지 말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눈을 빛낸 이상 남편은 어떻게든 길을 일단 깔 것이었다.
시선을 애써 피하다 마주치니 남편의 눈에는 혼자서라도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 그러나 그 속에 내가 동참해줬으면 좋겠다는 강한 기대가 들어있었다. 평소 내가 하고 싶다는 것은 거의 다 들어주는 남편의 기대를 차마 저버릴 수 없었다.
우려와 달리 계획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텃밭이며, 길이며, 강변에서 자잘한 돌을 주워와 대문에서 현관 앞 계단까지 일정한 폭으로 채우면 되는,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마당에서 계단 앞까지 그리 먼 거리도 아니니 며칠 정도만 바짝 노력하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터였다. 돌을 깔아 길을 만들면 확실히 마당이 더 예뻐질 것도 같았다.
그날부터 마당에 돌길 깔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먼저 우리 텃밭을 파헤쳐 크기가 적당하고 둥근돌을 찾아냈다. 그냥 돌로만 길을 채우면 심심할 것 같아서 납작한 돌에는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오랜만에 서랍 깊숙이 들어있던 물감과 붓을 꺼내 돌 위에 과일과 꽃, 강아지 발자국 등을 그려 넣으며 알록달록 귀여운 무늬가 새겨질 돌길을 떠올렸다.
그림 돌과 크고 작은 돌들을 줄줄이 잇대어 살짝 곡선 형태를 그리도록 길의 밑그림을 그렸다. 간단한 작업을 끝낸 것뿐인데 제법 윤곽이 나오니 뿌듯했다. 이대로라면 금방 돌길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텃밭에서 돌을 파내는 데 그치지 않고 산책을 다닐 때마다 조그만 가방을 들고 돌멩이들을 주워 날랐다. 강변에 앉아 예쁜 돌을 골라 오기도 했다. 가방이 제법 묵직해질 때마다 돌길이 한 뼘쯤 더 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제법 무거운 가방을 쏟아내 보면 막상 돌은 한 줄을 채 채우지 못할 만큼 적은 양이었다. 길의 폭은 은근히 넓었고 대문에서 계단 앞까지는 의외로 길었다.
낑낑대며 돌을 주워와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 마냥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며칠 동안 숙제처럼 목표치를 정해두고 돌 채우기에 매진했지만 땀을 뻘뻘 흘려도 한 뼘을 채우기가 어려웠다. 어느 정도 길을 채워놓은 뒤에는 이제까지의 노력이 아까워 그만둘 수도 없었다.
비록 몇 걸음 되지 않는 짧은 거리라 해도 없던 길을 새로 만드는 일에는 요행이 통하지 않았다. 느리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조금씩 돌을 날라 길 위에 까는 것만이 길을 만드는 유일한 길이었다.
길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도록 끝나지 않았다. 짧았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온 뒤에도 우리는 계속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올해가 가도 길을 완성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무렵 돌아보니 반쯤 깔린 길이 보였다.
쭉 깔린 길을 보니 그간의 과정이 헛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길을 다만 완성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이왕 하는 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을 약간 수정해 큼직한 돌로 길 테두리를 두르고 작은 돌로 여백을 채웠다.
사실 돌을 가져와 까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힘든 과정은 돌을 모으는 일이었다. 크기가 나름 비슷한 돌로 길을 채우려다 보니 돌을 구해 가져오는 것이 가장 일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비가 오고 난 어느 날, 물러진 땅을 우연히 파보니 자잘한 돌이 계속해서 나왔다.
옆집 할머니의 말씀으로 의문은 금방 풀렸다. 예전에 이 집에 사시며 정원을 예쁘게 가꾸셨던 아주머니가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매일 강변에서 돌 한 봉지씩을 주워와 길을 깔았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생겨난 길은 해가 바뀌고 주인이 바뀌면서 점점 땅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위로 풀이 자라 길은 흔적도 없이 묻힌 지 오래였지만 땅을 파보면 돌들이 흙 곳곳에 박혀있었다.
우리 앞에 먼저 길을 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지쳐있던 우리에게 묘한 위로를 주었다.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 그것은 아직 길이 채 나지 않은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나침반 삼아 나아가는 기분과 비슷했다.
앞사람의 자취를 더듬어 길 만들기를 이어갔다. 이 일을 먼저 해낸 사람이 있다는 위로에 기대어 나는 며칠, 몇 달, 몇 년이 걸려도 포기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길을 만들기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스스로를 느꼈다. 한 가지 일을 진득하니 하는 법 없이 이것 찔끔 저것 찔끔, 여기저기를 기웃대며 지금까지 살아온 내게 내 손으로 시작해 내 손으로 끝맺은 일이 주는 성취감은 상당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매일 오가는 우리 집 마당에, 내 손으로 직접 만든 길이 생겼으니 그 성취가 눈에 보이고 발에 밟혀 더욱 그랬다.
그 무엇도 시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힘들고 지겨워도 우직하게 반복해야지만 이룰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
내가 가는 이 길이 결코 나 혼자만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
어쩌면 사람의 인생은 살면서 길을 만들어 본 인생과 그렇지 않은 인생으로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우공이산,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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