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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16 두 사람과 두 마리

by 구루퉁 2023. 1. 24.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16화
- 두 사람과 두 마리

행복할 시간은 아직도 충분하다

도시에서의 삶과 비교하자면 시골에 와서 우리는 제법 분주해졌다. 현관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집’이었던 서울과 달리 여기서는 현관문을 벗어나면 실내보다 더 넓은 ‘우리 집’이 펼쳐지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잔디가 자라면 깎아주는 일, 꽃과 나무에 물을 주는 일, 텃밭을 돌아보고 벌레를 잡아주는 일, 다리 많은 친구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방역을 해주는 일 - 그 밖에도 철마다 날마다 해주어야 할 일들이 있었고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날씨에 따라 그날의 일이 결정되는 것, 그것이 시골의 삶이었다.

후추와 율무가 없었더라면 내 일상의 풍경은 얼마나 적막했을까.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에 들어온 털북숭이들, 두 사람과 두 마리의 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시골로 내려오면서 우리 못지않게 바빠진 것은 강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첫째 강아지 후추와 둘째 강아지 율무.
서울에서는 하루 종일 산책 시간만 기다리던 강아지들이 시골에 와서는 완전히 달라졌다. 현관문을 열어주면 아침부터 마당과 텃밭을 오가며 고양이들이 없는지 확인하는 듯 분주하게 영역표시를 했고 우리가 텃밭에서 작물들을 돌보고 있으면 강아지들은 현관문 앞이나 옥상에서 집을 지키듯 전방을 꼿꼿이 주시했다.

 

손님이 오면 열심히 짖어 현관문 벨 역할을 대신하는 것도, 종횡무진 마당을 누비며 도롱뇽이며 병뚜껑, 비닐봉지 등 온갖 것들을 발견하는 것도 강아지들의 몫이었다. 그런가 하면 꿀벌 냄새를 맡다가 벌에 쏘여 오기도 하고, 진드기며 나뭇잎을 털에 잔뜩 붙이고 돌아와 늘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한 삶을 추구하는 내게 아무런 사건사고 없이 무료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도 후추와 율무의 일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달랑 서로 뿐인 시골생활에 후추와 율무가 없었더라면 참 적적했을 거라고 이따금 생각한다. 이 작은 털북숭이들과 어쩌다 삶을 함께하게 되었더라, 돌이켜보면 우리가 강아지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아지들이 우리를 선택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2014년 추석 하루 전,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는데 그때 지금의 남편과 길거리를 걷다 우연히 ‘강아지 1만 원’이라고 크게 쓴 박스를 보았다. 노량진으로 향하는 번화한 거리의 편의점 앞이었다. 하다 하다 이제 편의점에서 강아지도 파는 건가 의아해서 알아보니 동네 주민 한 분이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차마 시장에서 내다 팔 수는 없어 집 앞 편의점에 박스를 내놓고 새끼 강아지를 키워줄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이었다. 새끼들이 누군가의 가족으로 눈 감는 것, 그것이 주인 분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박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천진한 얼굴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네 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새하얀 강아지들 사이에 까만 점으로 혼자 앉아 있던 작은 녀석이 후추였다. 후추라는 이름이 꼭 어울리는 까만 털이 군데군데 섞인 갈색 강아지, 다른 새끼들에 비해 유난히 작고 얌전했던 강아지.
사실 그 무렵, 회사 때문에 독립을 한 남편이 언젠가 강아지를 키워보고 싶다며 나를 한창 설득하고 있었는데 고향에서 강아지를 키워본 적이 있는 나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강아지를 키운다는 건 생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현실을 똑바로 보면 나는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학생, 오빠는 회사를 다니느라 바쁜 직장인. 우리 코가 석자였다. 그런데도 그날 밤 나를 바라보던 까만 눈이 자꾸 생각나서 오랜 대화 끝에 우리는 결정을 내렸다.
내일 다시 가서 그 강아지가 남아있다면 데려오자, 데려와서 강아지를 키우는 데 들어가는 일체의 비용은 남편이, 오빠가 회사에 가는 낮 시간 동안 강아지를 돌보는 것은 내가 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매사에 걱정 많고 준비가 앞서는 내가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을까, 잘도 엄청난(?) 짓을 했다 싶을 정도니 아무래도 그것은 모두 우리를 주인으로 알아본 후추의 큰 그림이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아무튼 다음 날 무언가에 홀린 듯 안아서 데려온 후추는 우리의 첫째 강아지가 되었고, 이후 강아지의 사랑스러움에 정신이 나가버린 우리가 눈처럼 새하얀 둘째 강아지 율무를 데려오면서 지금의 두 사람과 두 마리 체제가 완성되었다.
작고 까만 녀석과 보드랍고 하얀 녀석에게 여전히 홀린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이 녀석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고 우리는 우리가 꿈꾸던, 아이 없이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딩펫족’으로서의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현관 앞에 앉아 마당을 바라보는 저 강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에 들어와 아주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다. 내가 강아지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강아지들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는지도 몰랐다.
이 작은 숨들이 내 일상에 파고들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볼 때, 나는 속수무책으로 최선을 다해 너희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한다. 우리보다 빠른 시간을 살아가는 너희와 있는 힘껏 행복해지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과 두 마리, 시골에서의 삶은 아직 한 해도 채 흐르지 않았다. 이곳에는 우리가 모르는 시간이 가득하고 행복할 시간은 아직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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