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18화
- 여름 나기
에어컨 없이 산다는
지난봄, 어쩌다 시골에 살게 되어 급하게 이사를 한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우리 집 살림에 놀라며 에어컨을 싣는 것을 포기했다. 이사 오는 집에 에어컨 자리가 없기도 했고, 옆집 할머니 집에도 실외기가 보이지 않아서 아, 어쩌면 시골은 도시만큼 덥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한 까닭도 있었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우리는 에어컨을 서울 집에 놔둔 채 시골로 내려왔다. 그렇게 맞은 첫여름이었다. 초여름까지는 그래도 선풍기를 틀어놓고 찬물 샤워를 하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더위를 이겨낼 수 있었다. 한낮 시간만 피하면 아침저녁으로 바깥 활동을 하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강아지들도 바람이 잘 드는 문 앞에 누워 배를 내보인 채 혀를 빼물며 나름의 방식으로 여름을 났다. 여름을 맞아 강아지들의 털을 짧게 잘라준 것도 잘 한일 같았다. 여전히 바람 하나만은 끝내주는 황간면이었기에 온 집안의 창문과 문을 열어두면 바람도 제법 잘 통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여름이 어떤 여름이었던가. 초등학교 때부터 줄기차게 외워온 ‘고온다습’. 그렇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여름은 ‘다습’을 빼고는 논할 수 없었다. 고온이지만 건조한 편인 이탈리아나 지중해의 경우는 양산 하나만 써도, 그늘에만 들어가도 더위를 피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달랐다. 장마철이 다가오면서 다습의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말 그대로 ‘찜통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차가운 음료로 더위를 나 보려 한 것도 잠시, 고온을 피해 들어온 집 안에도 습기가 가득했다. 뜨거운 공기가 온몸에 달라붙어 끈적끈적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차가운 물을 몸에 끼얹어가며 샤워를 해도 그때뿐, 뽀송뽀송함이 채 삼십 분을 가지 못하고 다시 온몸에 옷이 달라붙었다. 그래도 당장 땀을 식힐 방법은 샤워를 하는 방법뿐이라서 남편과 나는 하루에 서너 번씩 샤워를 했다. 마을 어르신들이 낮에 모여계시는 경로당에는 에어컨이 있었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가서 어르신들의 질문세례를 받으며 앉아있을 깜냥은 차마 없었다.
밤이 되면 기온은 떨어져 시원했지만 습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매일 밤 창문을 열어젖히고 차가운 벽에 붙어 자면서 여름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고온’이 아니라 ‘다습’에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에어컨은 단순히 찬바람으로 온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제습으로 쾌적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가전제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이미 여름의 중턱, 더위의 정중앙에 있었다.
이제 와서 에어컨을 가져올 수도, 그렇다고 새 에어컨을 살 수도 없는 상황. 어디든 안으로만 들어가면 에어컨 바람이 빵빵하던 도시에서 냉방병을 달고 살며 자주 에어컨 없이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는 시골에 와서야 에어컨 없이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온몸으로 깨달았다.
에어컨 없이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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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것은 집중력이 떨어져서 아무리 재미난 책도 10분 이상 읽을 수 없다는 의미였고, 하루에 세 번 이상 샤워를 한다는 의미이면서, 불쾌한 상태가 이어지면서 별것 아닌 상황에도 짜증부터 내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에어컨 없이 산다는 말에는 불 앞에 서기 싫어 식생활이 점점 외식과 인스턴트 위주가 된다는 의미와 아무리 말려도 빨랫감이 제대로 마르지 않는다는 의미, 깊이 잠들지 못하고 수시로 잠이 깬다는 의미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까지 내가 에어컨 없이 산다는 것을 너무나도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다. 에어컨이 없어서 우리의 생활 전반이 삐걱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재택근무라는 나의 근무환경까지도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집 안을 가득 채운 습기를 도무지 견딜 수 없던 우리는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종일 제습기를 돌렸다. 습한 것보다 더운 것이 낫다는 결론에서 나온, 눈물겨운 선택이었다.
처음 제습기를 틀었을 때의 실내 습도는 95%. 정말 이게 실화인가 싶을 정도의 수치였다. 아니, 이 정도면 도대체 집이 수조 속과 어떻게 다른 건가 싶었다. 몇 시간 제습기를 돌리면 간신히 습도는 70%대로 내려갔지만 그게 다였다. 제습기를 돌려 에어컨 전기요금을 낼 바에야 차라리 에어컨을 들고 올 것을, 생각했지만 너무 늦은 후회였다. 비가 한바탕 내리면 습한 것이 좀 덜하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비라도 진탕 오라며 기우제를 지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히나 몸에 땀이 많고 더위를 많이 타는 남편에게 여름은 더욱 힘든 계절. 우리는 결국 집을 버리고 차 안에서 여름을 나기로 했다. 초록 대문을 열어젖히고 자동차를 마당 안쪽까지 끌고 들어와 현관문 바로 앞 잔디밭에 주차한 뒤에 자동차와 집 안을 오가며 생활하기로 한 것이다.
식사와 용변은 집에서 해결하고, 그 외의 시간에는 에어컨을 틀어둔 차에 강아지들과 함께 머물며 그동안 집 안에서 해왔던 여러 가지 일들-이를테면 책을 읽고, 일을 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일상적인 활동들-을 했다. 강아지들을 더운 집에 놔두고 카페나 도서관 같은 밖으로 나도느니 자동차를 피서지로 정해 다 같이 있자는 심산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렇게 며칠 지내보니,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확실했다.
처음에는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헛웃음을 웃다가도 익숙해지니 그런대로 지낼 만했다. 집에 있으면 침대에 눕기 일쑤였는데 차 안에서는 늘 앉아있으니 작업능률이 높아졌고 공간이 좁으니 강아지들을 더 자주 안아줄 수 있었다. 자잘한 집안일에 시달리지 않아서 대화할 시간이 많아졌고 환경이 쾌적해지니 짜증도 훨씬 줄었다. 밤이 되면 몸이 으슬으슬해질 때까지 차에서 에어컨을 쐬다가 집으로 들어가 곧장 잠들었다.
누군가는 서울에 멀쩡한 집을 놔두고 무슨 고생이냐고, 지지리 궁상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여름 나기.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확실히 깨달았다.
행복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
물론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설령 행복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마당에서 종일 잡초를 뽑아도, 집안에서 불쑥불쑥 돈벌레를 마주쳐도, 에어컨 없는 여름날 하루 서 너 번씩 찬물로 샤워를 해도 우리 둘이 함께 있다면 초라한 일상이 아닌 재미난 인생.
뜨거운 태양 아래 복숭아가 달달하게 익는 계절, 여름의 열기 속에서 내 마음도 조금쯤 단단해진 기분.
이곳의 여름이 깨닫게 해 준 소중한 기분이었다. 결국 에어컨 없이 사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우리에게는 두고두고 이야기할 추억 하나가 또 생겼다.
벌써 내년 여름을 어떻게 날까, 걱정이 앞서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짐짓 의연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부터 생각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니까.
아,
그리고 여름의 끝자락에서 알게 된 사실 한 가지.
할머니 집에도 에어컨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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