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19화
- 뱀이 나왔다
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바로 그 뱀 맞습니다
시골에 살겠다고 엄마에게 처음 말했던 날, 엄마의 낯빛은 어둡게 변했다. 엄마의 반응을 예상은 했었지만, 그 뒤의 물음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뱀 나오는 거 아니야?
뱀? 내가 아는 그 뱀? 다리 없고 몸이 긴, 그 뱀?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야생의 뱀을 보지 못한 나는 웃으며 설마, 집 마당에까지 뱀이 들어오겠어? 하고 말끝을 흐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뱀, 걔가 그렇게 아무 데나 쉽게 나오는 애는 아니겠지, 생각하면서.
이사 후 시골집에 처음 놀러 와서도 엄마는 뱀이 있을까 텃밭 근처를 꺼렸다. 우리 집 텃밭 뒤로는 나지막한 동산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종종 족제비가 내려와 주인이 울타리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는 조만간 뱀도 나올 거라며 사색이 되었다.
뱀이라면 끔찍하게 싫어하는 엄마는 인사를 드리려 찾아간 옆집 할머니께도 여기 뱀은 안 나오느냐고 여쭸다. 할머니는 그날따라 말씀이 없으셨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미소만 띠실 뿐이었다. 엄마는 떠나는 순간까지 찜찜함을 떨치지 못했지만 우리는 뱀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초봄까지도 마당은커녕 길에서조차 뱀을 보지 못했다. 지네며 돈벌레, 파리, 모기와의 전쟁이 시작된 후로는 뱀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나온다면야 벌레보다야 뱀이 훨씬 더 큰 문제겠지만 공상 속의 뱀보다 눈앞에 닥친 벌레가 먼저였다.
그렇게 뱀이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내던 평화로운 여름날. 메추리 두 마리를 키우며 알을 얻어먹는 재미에 푹 빠진 우리는 메추리알 부화기를 중고로 구해 메추리를 더 부화시키기에 이르렀다. 메추리알 부화기를 10만 원에 구매해 한 번 쓴 뒤에 다시 중고시장에 9만 원 정도로 내놓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어렵지 않게 부화기를 중고로 구해 유정란을 넣었다. 전구와 가습기로 온습도를 맞추고 두 시간 간격으로 직접 알을 굴려줬던 저번과는 달리 부화기는 알을 넣어놓고 물을 채운 뒤 전기코드를 꽂아 놓기만 하면 전자동으로 작동되었다. 메추리알을 스무 개를 넣어두고 우리는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과연 부화기는 10만 원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능력을 자랑했다. 스무 개의 메추리알 중에 아홉 개에서 메추리가 나와 거의 50%에 달하는 부화율을 달성한 것이다. 암수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총 열한 마리의 메추리가 우리 집 식구가 되었다.
새끼 메추리들을 며칠간 집안에서 키우다 날씨가 따뜻해진 후에는 텃밭 옆 마당의 육추장 아래층으로 옮겨주었다. 그렇게 육추장 위층에는 메밀이와 수수가, 그리고 이름을 아직 한 마리 한 마리 지어주지 못한 아홉 마리의 메추리들은 아래층에서 뾱뾱뾱, 울었다.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는 메추리를 보며 우리는 조만간 메추리알을 더 많이 얻을 수 있겠다며 잔뜩 들떴다.
한여름이 되고 나서부터는 낮 시간에 마당에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마을 이장님이12시부터 3시 사이에는 밭일을 하지 말라는 방송을 할 만큼 한낮의 뙤약볕은 뜨겁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었다. 차에서 피서를 하기 전까지는 바깥에 볼 일이 있는 남편만 가끔 낮 시간에 집 밖을 들락거렸는데, 폭염경보가 있었던 어느 날, 그늘에서 메추리장을 살피던 남편이 깜짝 놀라 집으로 들어왔다.
뱀이 나왔어.
더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남편이 말했다.
뱀? 뱀이라고? 도대체 뱀이 어디서 들어왔지? 정말인지 납량특집 호러 영화가 따로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져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남편이 덧붙였다.
뱀이 메추리를 먹고 있어…!
세상에, 뱀이 단순히 마당이나 텃밭에 나타난 게 아니라 우리 집의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인 메추리를 먹고 있다니! 그 말 한마디에 영화의 장르는 호러에서 스릴러로, 단숨에 변해버렸다. 단순한 호러 장르라면 뱀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 되었지만 스릴러라면 얘기는 달랐다. 상황이 스릴러라는 것은 우리가 나서서 뱀을 쫓아버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소리 소문 없이 들어온 것도 모자라 식구까지 먹어치우는 침입자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편을 따라 나가보니 새끼들이 모여있는 아래층 메추리장 틈새를 벌려 들어간 뱀이 메추리 한 마리를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었다. 새끼 메추리들은 뱀을 피해 푸드덕푸드덕 뺙뺙 난리가 났고 뱀은 메추리 한 마리를 천천히 소화시키는 중이었다.
일단 남은 새끼 메추리들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리빙박스를 가져왔다. 뱀이 메추리장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어서 문을 열어 나머지 메추리를 빼내기가 쉬웠다. 남은 여덟 마리의 메추리를 리빙박스에 옮겨 넣고 이제 메추리장 안에 남은 것은 뱀과 뱀에게 먹힌 메추리 한 마리뿐.
뱀을 어떻게 꺼내지? 초록창에 검색해봐도 뱀을 잡는 그렇다 할 방법은 나오지 않았고, 주위에 뱀을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한 마땅한 도구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하는 동안 남편은 기다란 나뭇가지로 뱀을 들어내 체망에 안에 넣었다.
어두운 색깔의 격자무늬를 한 뱀. 그렇게 크지는 않았지만, 작다고도 할 수 없었다. 꿈틀대는 뱀을 실제로 보니 온몸이 굳는 느낌이었다.
일단 뱀을 생포하기는 했는데 이제 이 뱀을 어떻게 하지?
초록 창의 도움을 한 번 더 받아보려 했지만 잡은 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이 뱀이 독사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데다 뱀을 그냥 뒷산에 풀어주자니 또 내려올 것 같고, 목을 따서 죽이자니 너무 끔찍해서, 버리려고 내놓은 플라스틱 통에 뱀을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통을 볕에 내놓자 더위에 약한 뱀은 삼킨 메추리를 뱉어내면서 괴로운 듯 몸을 비틀었다. 이대로 통 속에서 익혀(?) 죽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몸부림치는 뱀을 뒤로하고 한숨 돌리려는 찰나 문득 뱀이 익어버릴 더위라면 메추리들은 괜찮을까,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메추리를 넣은 리빙박스도 그늘이 아닌 볕에 내놓았는데. 황급히 리빙박스를 열어보니 여덟 마리 메추리가 모두 쓰러져 있었다. 날도 뜨거운데 뚜껑까지 덮어 볕에 내놓았으니, 비록 몇 분간이라고 해도 어린 메추리들에게는 폐사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던 것이다.
부화기까지 사서 몇 날 며칠을 기다려 태어난 메추리들인데, 뱀에게 먹힌 것은 어쩔 수 없다 쳐도 우리의 부주의로 인해 허망하게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직 채 다 자라지도 못했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면 메밀이와 수수는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뱀이 위층까지는 올라가지 않아서 메밀이와 수수에게는 별 피해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 집 메추리는 다시 메밀이와 수수만 남았다.
열한 마리까지 늘었다가 단숨에 다시 두 마리- 허망하고 허망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뱀은 조심성이 많고 예민한 동물이라 사람이 사는 것 같으면 거의 나오지 않는단다. 아마도 뱀은 산을 통해 우리 집 텃밭으로 내려온 듯싶은데, 여름이 되면서 텃밭과 마당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방치해두었더니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고 판단해(?) 뒷마당까지 들어온 모양이었다.
뱀이 오해할 만큼 무성하게 방치된 텃밭, 애꿎은 뱀을 탓할 것도 없었다.
뱀이 폭풍처럼 멘탈을 흔들고 간 뒤 남편은 예초기로 마당의 풀을 다 베었다. 흙으로 뒤덮여있던 뒷마당 일부에도 시멘트를 발라 경계를 나눴다. 조금쯤 사람 사는 꼴을 해놨으니 이제 더 이상 집에서 뱀을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그 뒤로 뱀을 집에서 본 적은 없지만 봄과 가을 무렵 산책길에서 종종 뱀을 마주쳤다.
네, 여러분. 시골에 뱀이 나온다는 말, 그 말은 진짜였습니다. 봄과 가을, 한적한 시골길을 걸을 때에는 반드시 발 밑을 확인하며 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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