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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20 옥상의 계절

by 구루퉁 2023. 1. 28.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20화
- 옥상의 계절

달밤의 밤손님

  열기가 절정에 달하는 낮에는 얼른 이 계절이 빨리 지나가버렸으면 싶다가도, 밤이 되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도 그렇게 나쁜 계절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시골은 열대야가 도시만큼 심하지는 않아서 우리는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옥상을 자주 오르내렸다. 옥상에 평상과 좌식 테이블, 해먹과 모기장, 텐트까지 마련해두고 그날그날 기분따라 여름밤을 한껏 즐겼다. 어떤 날은 해먹에서 여름밤에 어울리는 노래를 들었고 또 어떤 날엔 텐트 안에 누워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여름의 낙이라고 하면 단연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함께 마실 사람.

덥고 습하고 그래서 짜증나는 여름이지만, 이런 계절에도 낭만은 있다. 여름의 낙이라고 하면 단연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함께 마실 사람.

  가장 자주 먹게 되는 안주는 아무래도 치킨이었는데, 어렸을 때 몇 번 시켜먹고는 가게를 찾지 못해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간 치킨 브랜드를 황간에서 찾은 뒤로는 단골손님이 되었다. 집으로 치킨이 배달 온 첫날, 사장님께서 대문 앞에 달린 명패를 보고 자기도 문씨라며 무척 반가워해주셔서, 그 후로는 주소가 아니라 '문씨네 집이요'라고 주문하면 대번에 아시고 배달해주시는 것이 퍽 신기했다.

  몇 번지 몇 동 몇 호가 아니라 초록 대문 문씨네, 라니.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사는 곳이 기억되는 여기에서 사장님과 우리는 갑을 관계가 아닌 이웃이었다.

  모기향 하나를 피워 올리고 남편과 평상에 마주 앉아 맥주와 치킨을 먹는 밤이 기나긴 여름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밤에 보는 동네의 풍경은 낮에 보는 풍경과 또 달라서 낯설고 새로웠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웃집 불들이 하나 둘 잦아들었다. 눈을 감으면 간간이 물건을 실어 나르는 화물기차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황간의 여름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시골에서 살 수 있을까?


 

  태어나서 한 번도 시골에 살아본 적 없고, 그 흔한 시골 친척집도 경험하지 못한 내가 시골로 이사하기로 했을 때, 나의 첫 번째 물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과연,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인가-

  시골살이 세 달 차가 넘어가면서 나는 조금씩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도시는 내게 맞지 않는 신발이었다.

  비슷한 신발밖에 가진 게 없었던 나는 내내 신발에 발을 맞춰보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발만 아팠다.

  큰 맘먹고 신발을 바꾸고 나서야 진짜로 바꿔야 했던 것은 내 발이 아니라 신발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때로 맞지 않는 신발을 잠시 신게 되더라도, 내 발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이 세상 어딘가에 내 발에 맞는 신발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 신발을 찾을 수 없다면, 내가 만들어봐도 좋겠다는 마음도 아주 조금 생겼다.

  발이 편해서, 내 삶은 조금 더 가뿐해졌다.

  '시골에서 살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그동안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지?'하는 물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도시가 아닌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우리 삶에는 더 많은 선택지가 생겼다. 우리 둘 다 이런 변화를 싫어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여느 때처럼 옥상에 앉아 아무도 없는 밤거리를 응시하던 어느 날에는 문득 대문 밖으로 일렁이는 낯선 그림자를 보았다. 잘 못 본 걸까, 싶다가도 계속 보여서 뭘까, 뭘까 하며 숨 죽이고 기다렸다.

  이윽고 나뭇잎이 부스럭 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가로등 아래로 작고 하얀 것이 깡총, 튀어나왔다. 그 뒤를 따라 좀 더 커다란 그림자가 쫓아 나왔다.

  가로등 아래, 달 밝은 날의 밤손님은 바로 삼색이와 턱시도, 그리고 턱시도의 새끼 고양이 한 마리, 아니 두 마리!

  밤 산책에 신이 나는지 새끼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턱시도는 그런 새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끼들을 어느 정도 키워놓았는지 혼자 나온 삼색이는 유유자적 여름밤의 여유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아주 떠난 것이 아니었구나!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새끼를 가진 턱시도가 경계를 할까 봐 멀찍이서 고양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새끼를 낳고 기르느라 뜸했구나, 싶었다.

  삼색이와 턱시도, 그리고 새끼들까지. 아무래도 황간의 길고양이들과 우리의 인연은 조금 더 이어질 모양이었다.

  내일은 두 마리 어미 고양이를 위해 특식을 만들어 줄까-

  한동안 또 강아지와 고양이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질 텐데, 내 얼굴 위로 슬그머니 엄마미소가 퍼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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