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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22 그날의 우리

by 구루퉁 2023. 1. 31.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22화
- 그날의 우리

물한계곡 가족나들이

  절기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그저 순서대로 흘러갔다. 따뜻한 봄기운이 맴돌기 무섭게 더운 초여름 날씨로, 습기를 잔뜩 품은 공기와 장마로- 그리고 무더위로 이어지는 여름의 순서.

   한 세기 전에도 이곳의 여름은 더위-습함-장마-무더위로 이어져왔을 것이고, 앞으로도 여름은 그 순서대로 왔다 갈 것이었다.

  과거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인간의 탐욕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지구가 매년 여름마다 최고 기온을 경신하고 있다는 사실뿐. 

담마다 능소화가 한창인 늦여름. 시골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꽃이 계절의 이름이 될 수 있음을.

 

  70여 년을 살았지만 지금처럼 더운 여름은 처음이라는 할머니의 말씀에 새삼 2017년 여름의 위엄을 실감하며 나는 과즙이 풍부한 여름 과일을 먹고 에어컨도 쐴 겸 등록한 운전학원에서 면허를 땄다.

  그렇게 시골에서 처음 맞는 2017년의 여름도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루빨리 더위가 가시길 바랐지만 막상 여름이 끝나간다고 생각하니 섭섭해진 우리는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이 계절에만 할 수 있는 재미난  마음껏 하기로 했다.

  물론 농사일은 재미난 일에 포함될 수 없었다.

  산 가까이 붙어있는 우리 텃밭은 잠시 풀을 메러 근처에 다가가기만 해도 모기 수십 마리가 달려드는 곳이었고, 심지어 장마 기간 내내 일을 쉰 탓에 텃밭에는 잡초와 작물이 분간할 수 없을 지경으로 뒤엉켜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곳을 다시 쓸만한 텃밭으로 되돌려놓는 것은 재미가 아니라 명백한 노동의 영역이었다.

  옆집 할머니는 우리가 텃밭농사를 포기(사실 반쯤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시골살이 1년 차인 우리는 잡초가 무성한 텃밭에 한 번씩 들어가 토마토며 고추, 블루베리를 따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했다고 생각하셨는지 종종 현관문 옆 책상 위에 여러 가지 작물을 올려두고 가셨다.

   젊은 사람 둘이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돈벌이도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텃밭까지 폐허가 되어가니, 이 어린것들이 뭘 먹고살고 있는지 노파심이 드신 걸까.

  아무튼 할머니의 은혜로 우리는 텃밭농사를 망한 것 치고는 그럭저럭 다양한 텃밭 채소들을 맛볼 수 있었다. 잡초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그 가운데 자라난 강인한 작물만 골라 먹기-이것도 나름 여름의 재미라면 재미였다.

  생각 끝에 우리는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영동군에 있는 계곡으로 피서를 떠나기로 했다. 알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영화 <집으로>의 촬영지와 인접한 '물한계곡'이 자리하고 있었다.

  계곡물이 너무 차서 '물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곳은 골짜기가 깊어 대낮에도 짙은 숲 그늘이 드리우는 최적의 피서지로 잘 알려져 있었다. 우리는 영동군에 살며 물한계곡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이곳은 매년 여름이 되면 의외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차들이 죽 늘어서기도 하고, TV에 방영된 근처 맛집이 피서 온 사람들로 여름내 문전성시를 이루는 꽤(?) 알려진 여행지였다.

  여기다!
  무엇보다 차를 타고 멀리 나가기 싫은 우리에게 물한계곡은 적당히 가까워 마실 가는 기분으로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좋은 위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몰려드는 주말을 피해 우리는 평일, 그것도 낮 3시라는 애매한 시간에 두 마리 강아지와 함께 물한계곡으로 향했다.

  골짜기를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다가 적당히 마음에 드는 곳에 멈춰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계곡을 따라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닥이 훤히 비치는 맑은 물에 발을 담갔다.

  과연 물한이라는 이름처럼 계곡물은 무척 차가웠다. 살짝 발을 담가놓은 것만으로도 벌써 등줄기에 흐르던 땀이 식는 기분이었다. 에어컨을 쐴 때처럼 뼈마디가 시리거나 으슬으슬 춥지 않은, 아주 편안한 시원함을 느끼며 우리는 가져온 간식을 먹었다.

  평일의 물한계곡은 한적했다. 우리가 자리 잡은 곳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만 들렸다. 조용한 평일 4시의 물한계곡에서 우리는 여름내 지친 몸과 마음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상쾌함을 만끽했다.

  간만의 시원함에 강아지들도 신이 나기는 마찬가지.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후추와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물을 마시는 율무. 이 모든 순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마음에 들어왔다.

 

 

 

  오늘의 우리를 가슴 속 깊이 담은 날. 이 날의 하늘과 바람과 구름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 강아지들은 대부분의 순간 줄을 묶고 있었고 계곡에 도착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잠시 줄을 풀어주었음을 알립니다. 쓰레기와 배설물은 모두 수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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