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23화
- 달콤한 일상
과일이 있는 삶 : 복숭아, 그리고 포도
영동군에는 복숭아 농사를 짓는 곳이 많다. 우리 집 근처에도 꽤 큰 복숭아 밭이 있다.
처음에는 무슨 나무인지도 몰랐지만 가지 끝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던 꽃이 지고 푸릇푸릇한 잎이 온 나무를 뒤덮고, 정체모를 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리더니 어느 순간 복숭아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아, 이 나무가 복숭아나무로구나 깨달았다. 그간 코 끝을 간질이던 달큰한 향기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오며 가며 복숭아나무의 성장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복숭아를 먹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 숨을 마시며 자란 이 동네의 복숭아나무는 우리와 이웃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가장 처음 복숭아를 산 곳은 산책길 옆에 있는 농원. 우리와 같은 공기와 물을 마시고 같은 풍경을 보고 자란 복숭아의 맛이 퍽 궁금해서 산책을 할 때마다 농원을 기웃거리며 인기척을 살폈다.
그러다 하루는 농장 주인아저씨를 만났는데, 아쉽게도 오늘 딴 복숭아는 모두 실려갔으니 내일 아침에 오라고 하셨다. 옆동네에 사니 다시 들르겠다며 발걸음을 돌리는 우리에게 아저씨는 검은 봉지 하나를 건네주셨다. 봉지 속에는 커다란 복숭아가 한가득 들어있었다
따기 전에 떨어져서 상처가 생긴 낙과(落果)였다. 상품으로 내놓지는 못하지만 맛은 상품 못지않을 테니 먹어보라는 아저씨의 넉넉한 인심을 품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말랑한 복숭아 몇 개를 골라 얼른 껍질을 깎았다. 달큰한 복숭아 향이 향긋하게 퍼졌다.
크게 한 입 베어 문 복숭아는 향기만큼이나 달콤했다.
봄을 가득 담은,
색깔로 치자면 아주 연한 분홍의 맛.
봄의 들판에 분홍빛으로 넘실거리던 꽃을 그대로 품은 듯 복숭아는 달고 촉촉했다. 그 전에도 복숭아를 먹어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달고 촉촉한 복숭아를 나는 여태껏 먹어본 일이 없었다. 앉은자리에서 주먹만 한 복숭아 서너 개를 먹으며 복숭아에 한껏 빠진 나는 그날부터 영동군에 사는 사람으로서 하루 한 개 이상의 복숭아를 무조건 먹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의 달콤한 일상이 시작됐다.
몇 군데 농원을 돌아다니며 복숭아를 사 먹다가 집에서 차로 5분 정도 떨어진, 우리가 이사를 온 이래로 한 번도 열려있지 않던 가게 자리에 생긴 복숭아 가게의 단골이 되었다.
그렇다 할 간판도 하나 없는 그 가게는 여름과 가을에만 반짝 열어 복숭아와 감을 파는 곳이었다. 가격은 직판장 가격으로 중간 유통과정이 없으니 마트나 시장에서 사는 것보다 몇 천 원 정도 저렴했고, 운이 좋으면 낙과나 덤을 얻을 수도 있어서 우리는 그곳에 자주 들렀다.
농장에서 직접 키운 복숭아와 감을 한철에만 이곳 가게에서 파신다는 주인아주머니는 세 번째 방문쯤에 나를 알아보시고 또 오셨네, 복숭아를 정말 좋아하나 봐요-하며 복숭아 서너 개를 더 얹어주셨다.
올해는 작년보다 비가 많이 와서 복숭아 맛이 덜하다-그렇담 도대체 작년의 복숭아는 얼마나 맛있었던 걸까?-는 이야기도 아주머니로부터 들었다.
가게를 자주 드나들며 복숭아를 한 봉지, 한 박스 사가면서 장택이며 미백, 서왕모와 같은 복숭아 품종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삭아삭하면서도 달달한 장택, 과육이 부드러운 미백, 알이 크고 말랑말랑하면서 달콤한 서왕모까지-시기별로 출하되는 복숭아를 먹으며 나는 복숭아를 물릴 때까지 먹을 수 있는 영동군에 뼈를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긋하고 은은한 복숭아를 끼니 대신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복숭아 철이 끝나갈 즈음 마지막 백도 복숭아 한 박스를 샀다. 아주머니는 자주 와줘서 고맙다며 내년에 또 와요, 하셨다.
복숭아 끝물에는 포도가 나오기 시작해서 새콤달콤 맛있는 포도를 원 없이 먹었다. 사는 동네에서 키운 제철 과일을 실컷 먹으며 여름을 날 수 있는 이곳에서의 삶을 나는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여름빛 가득 담은 과일을 먹는 동안 황간의 여름도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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