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25화
- 시골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하루의 길이
십 대 시절부터 나는 내가 있을 곳은 내가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 어디에도 내 자리 같은 건 없을 것 같았다.
태어나서 자란 고향 말고, 학교 때문에 살아야 하는 곳 말고, 내가 선택한 곳- 그런 곳에서 내가 선택한 방식으로 온전히 나답게 살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며 시골로 옮겨왔다. 시골에서 생활한 지 여러 달이 흐르면서 시골생활은 어떠냐는 물음을 자주 받게 되었다. 가볍게 안부차 묻는 사람에게도,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사람에게도 '아무래도 나, 시골 체질인 것 같아.'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내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시골생활의 어떤 점이 좋으냐고 다시금 묻고, 그때마다 나는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한다.
"시골에 오니까 시간이 정말 많아."
도시에서 나는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했다.
아침마다 휴대폰 시간을 분 단위로 확인하며 화장을 하고, 5분 간격으로 오는 지하철-5분 차이로 뒤에 오는 지하철을 타면 도착하는 시간은 최소 20분에서 최대 40분까지 늦어졌다-을 놓치지 않으려고 에스컬레이터를 뛰어내려 가고, 수업과 과제만으로도 빡빡한 하루 일정에 아르바이트며 대외활동을 끼워 넣느라 몇 주 동안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못했다.
종일 정신없이 보냈지만 왠지 모를 공허감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날들.
도시에서 나는 늘 무언가를 하는 중이거나, 무언가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삶, 그것이 도시에서 보낸 나의 하루였다.
그런데 그 '하루'가 시골에서는 정말 길었다.
하루, 한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이 지나는 시간.
한없이 길다가도 더없이 짧은, 무수히 반복되어 온 이 별의 일.
시골로 내려왔다고 해서 하루가 갑자기 30시간이 된 것도 아닌데 내가 느끼는 나의 하루는 훨씬 길어졌다. 단지 사는 곳을 바꾸는 것만으로 시간의 흐름이 이렇게나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 걸까?
시골에서의 시간 감각에 관해 남편과 의견을 나눈 끝에,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삶의 터전을 시골로 옮기면서 내가 하던 외부활동 자체가 많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궁극적인 이유는 도시에서와 달리 시골에서는 '버리는 시간'이 훨씬 줄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버리는 시간'에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가 포함될 수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이동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도시에서의 삶을 되돌아보자.
일단 어떤 장소까지 가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1시간 정도 걸리는 게일반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이 생기면 적어도 2시간 전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어떤 자리냐에 따라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 데만도 1시간이 족히 걸리니 2시간 전부터 준비를 해도 여유롭게 집을 나서기는 어렵다. 느긋하게 준비를 하려면 2시간 30분, 3시간 전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한두 시간짜리 일정을 위해 준비에 3시간을 쓰는 것은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집에서 입는 편한 옷을 입고, 화장을 하지 않고 갈 수는 없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 가는 동안 마주할 숱한 얼굴들을 떠올리면 비비크림이라도 발라야 마음이 편해진다. 언제 어디서 생길지 모를 일을 대비해 가방 속에 무거운 노트북을 챙기는 것은 기본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도 가치 있게 쓰기는 쉽지 않다. 일단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설령 앉더라도 흔들리는 교통수단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최적의 동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집중력이 좋지 않은 나는 주변이 어수선하면 책을 읽거나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주로 할 수 있는 건 음악을 듣는 일뿐이었다. 주말이나 퇴근 시간이 겹치면 이동시간은 더 늘어난다. 길 위에 버리는 시간이 그만큼 더 많아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일정을 소화하는 데만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니 집으로 돌아온 후에 다른 일을 할 기력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꼭 해야 하는 일만 겨우겨우 해낸 채 한 것은 없는데 피곤한 상태로 침대에 눕지만, 끊임없이 울리는 카톡과 바깥의 소음으로 쉽게 잠들지 못한다.
반면 시골에서는 '본질에 충실한' 생활이 가능하다. 일단 어떤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옷을 골라 입거나, 화장을 하거나, 무거운 물건들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그냥 집에서 입는 편한 옷을 입고 꼭 필요한 물건만 넣은 천가방을 챙겨서 볼일만 보고 돌아오면 그만이다. 화장은 아예 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도시에 비해 사람을 덜 마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골의 분위기 자체가 실용적인 것을 선호하는 까닭이다.
(물론 시골에도 화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서비스직에 종사하거나 젊은 사람들의 경우 화장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개개인이 느끼는 꾸밈노동에 대한 압박은 시골이 훨씬 덜한 것 같다.)
높은 굽의 신발은 흙길을 다니기 어렵고, 향수나 화장품의 자극적인 향은 벌을 불러올 수 있다. 자연을 가까이 두고 살다 보니 인위적이고 불편한 것을 최대한 피하게 되는 것이다.
이동에 있어서도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교통체증이 없으니 스트레스가 훨씬 덜하다. 단적인 예로 예전에 서울에 살 때 우리 집에서 강남역까지의 거리는 20km 정도였는데 자동차로 가면 1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러나 지금 우리 집에서 시내까지의 거리도 그때와 같은 20km인데 시간은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도시에 비해 신호도 적고 교통이 덜 복잡하다 보니 이동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목적을 빠르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버스를 타더라도 만원이 되는 일은 좀처럼 없고 웬만해서는 앉아서 갈 수 있다.
이처럼 시골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이동하는 데 에너지를 많이 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시골에서는 정신적으로 더욱 여유가 생기고, 그것이 시간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높은 건물,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뛰어가는 행인... 나를 둘러싼 환경 자체가 분주한 도시와 달리 시골에서는 주위를 둘러보면 하늘과 산이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하늘과 산은 공연히 마음만 분주한 내게, 조금쯤 쉬어가도 좋다고 말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양과 산의 풍경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무척이나 천천히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영혼 없이 몸만 분주했던 도시에서와 달리 시골에서 나는 매 순간 온전히 존재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사랑하는 존재들과 눈을 맞추고, 내가 먹을 끼니를 준비하는 시간.
그런 시간이 있는 시골에서의 삶은 내가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이제껏 내가 거쳤던 많은 도시들은 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여기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나 스스로 선택한 내가 살아갈 곳,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건 내가 선택한 가족
이것이 내 행복이다.
달리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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