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26화
- 가을이 왔다
가을엔 걸어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온 세상을 녹여버릴 듯 이글거리던 공기가 어느 순간 서늘하게 목덜미로 파고드는 계절의 감각만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십 번이나 겪은 일이지만 여름에서 가을로, 그러니까 봄부터 사방으로 뻗쳐나가 여름에서 절정을 맞은 기운이 서늘한 살기를 뿜으며 음으로 잦아드는 가을의 문턱은 언제나 내게는 낯설고 새로운 감각이다.
하지만 그런 기분과는 별개로, 더위가 한 풀 꺾이며 조금씩 시원 해지는 이 시기는 일 년 중 얼마 되지 않는 좋은 계절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는 것. 이 시기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마니까. 그래서
틈날 때마다 걸었다.
시골의 가을은 정말인지 집에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초조할 때마다 걸었다. 마당이고 동네고 하천이고 할 것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날이 서늘해지자 대번에 길 위로 나온 뱀을 마주치는 일이 종종 있어서 발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걸었다. 몇 차례 빠르게 도망가는 뱀을 본 뒤로는 나뭇가지만 보고도 놀라 펄쩍 뛰었다. 길에서, 풀숲에서, 심지어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까지 뱀을 만났을 때, 자전거를 사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도 걸을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었다. 이유 없이 초조하거나 우울할 때 마당에 나가 잠깐 걷기만 해도 기분이 나아졌다. 집 안과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나는 나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초조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술을 마시고 사람을 만나고 하염없이 도시를 배회하며 닥치는 대로 나를 소진했다.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잠들 수 있을 때까지.
시골에 와서 내 초조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 초조함을 조금쯤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잠시, 이 순간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이 기분이 또 금방 지나갈 거라는 것도.
숱한 경험과 반복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서른이 되면 나는 좀 더 능숙하게 이런 감정들을 대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나를 다루는 방법을 터득해간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걸으면서
가을이 다만 달력의 숫자로, 뉴스의 일기예보로, 휴대폰 속 단풍사진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가을은
산으로 들로 물로 밭으로
하늘로 나무로 색깔로 냄새로 왔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왔다.
높고 높은 아침의 파란 하늘로, 대추나무의 붉은 대추알로, 들판 위 도라지의 보랏빛깔로
그렇게 가을이 살금살금 내 곁으로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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