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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28 버스를 탑시다

by 구루퉁 2023. 2. 8.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28화
- 버스를 탑시다

현지인(?)의 첫걸음, 버스타기


정류장이 있는데 왜 쓰질 못하니....! 버스 타기에 도전하는 나의 자세


  현지인, 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각자의 기준이 있겠지만 내게는 어려움 없이 버스를 탈 수 있는 그 순간, 부터다. 거의 모든 해외여행을 함께 한 나와 남편은 여행지의 기차나 지하철을 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트램이나 버스를 타려고 하면 정신이 혼미해졌다. 유명한 도시에서도 우리는 트램을 타지 못해 길을 헤맸고, 버스 정류장을 잘못 찾아 엉뚱한 곳에서 버스를 탔다. 그러다 보니 트램과 버스, 그중에서도 어느 도시에 가나 있는 버스를 타는 일은 특히 우리에게 애써 외면하고 싶은 일이 되고 말았다.

  가장 최근에 '외국에서 버스 타기'에 도전한 것은 현지인이나 현지인인 지인이 있지 않고서야 버스 노선표를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도시, 방콕. 한 호텔에서 며칠간을 연이어 머물면서 우리는 어쩌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상철에 비해 버스요금이 매우 저렴하고 어쩐지 현지 사람들의 일상을 더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구글맵으로 동선을 검색하고 호기롭게 버스에 올랐지만 버스 직원은 영어를, 우리는 태국어를 하지 못했고 급기야 직원은 우리에게 전혀 악의 없는 표정으로 'Get out'이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고도 어디서 솟은 패기인지 다시 한번 도전한 방콕 버스에서 마음씨 고운 일본 여자분이 영어로 통역을 해주셨으나 우리는 결국 알려준 버스가 서는 곳을 찾지 못하고 쓸쓸히 지상철 플랫폼으로 향했다.

  아무튼 대부분의 지역에서 버스는 시내 중심부와 외곽을 아우르며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버스를 타면 어렵지 않게 번화가에 닿을 수 있고 유명한 관광지나 지역 랜드마크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지하철도 그렇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다는 점이 버스의 가장 큰 매력. 종종 마음이 답답할 때면 나는 버스에 올라 내가 알던 도시의 면면을 창밖으로 내다본다. 그것만으로도 낯선 도시에 여행을 온 여행자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도시에 살았을 때는 버스를 이용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버스가 어디에 서는지, 몇 분 뒤에 오는지, 다음 버스는 어디쯤 있는지, 도착하면 몇 시쯤 일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버스를 타는 것은 내게 완전 미지의 세계.

  뻥 뚫린 도로 옆길에 뜬금없이 서있는 버스 정류장에는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모니터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다. 버스 정류장을 기웃거려봐도 보이는 건 노란 버스 시간표뿐. 이걸 보면 되겠다, 생각한 것도 잠시 시간표에는 내가 모르는 이 동네의 지명들이 가득했다. 게다가 정류장이 모두 적혀있지 않고 출발지와 도착지만 쓰여있으니 이래서야 어디서 어디로 가는 버스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실마리를 찾는 것은 포기하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래,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버스 노선 하나 못 찾을까. 영동군 버스, 영동군 시내버스.... 갖가지 검색어를 집어넣어보다 결국 영동군청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군청 홈페이지에는 농어촌(!)버스 노선에 대한 설명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의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버스를 타는 거지? 옆집 할머니께 여쭤봐야 하나? 아니면 이장님?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던 차에 내 눈에 띈 건 문의사항이 있으면 전화하라는 안내문이었다.

  043을 붙여 전화를 걸었다. 달칵, 한두 번 발신음이 가더니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저기 OO정류장에서 영동역 쪽으로 나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나요?"
  직원은 이런 문의를 받아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닌 듯 능숙하게 말을 이었다.
  "황간면에서 영동군으로 나가는 버스는 지금부터 1시 10분, 1시 30분, 2시에 있습니다. 황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때 출발하는 거니까 그 정류장까지는 2~3분 걸릴 거예요."
  "네? 배차 간격이....? 그럼 버스 번호는....?"
  "따로 없고 그냥 정류장에 서 계시다가 오는 버스 타시면 됩니다."
  "아, 후불교통카드는 되나요?"
  "네. 됩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다니...! 그냥 버스 운수회사에 전화를 걸어 배차시간을 확인하면 번호고 뭐고 다 필요 없었던 것이다. 어쩐지 허탈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버스는 정말 예정된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정류장에 서 있는 나를 본 기사님은 내 앞에 차를 멈춰주셨다. 어쩐지 어색한 기분으로 버스에 올라 도시와 똑같은 승차단말기 기계에 후불교통카드를 갖다 댔다. '감사합니다' 소리에 혹시 안 찍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버스 안을 둘러보니 젊은 승객은 나를 포함해 둘셋쯤. 그 외에는 모두 나이가 지긋하셨다. 버스에 올라타니 저 처자는 어느 동네 누구인고, 하는 어르신들의 마음속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쭈뼛거리며 뒷줄에 앉았다. 암묵적으로 앞 좌석은 어르신들 좌석이고 젊은 사람들은 뒤로 가는 분위기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니 늘 보던 풍경이 새롭게 느껴졌다.

  버스 안의 어르신들은 서로가 서로를 아시는 듯 청자가 명확하지 않은 말로 대화를 이어가셨는데 그래서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불쑥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많았지만 이 동네 어르신들은 이렇게 버스에서 서로 만나 근황을 전하고 마을 소식을 교환하는 모양이었다.

  농사를 주제로 시작된 어르신들의 대화는 어느새 날씨로 이어졌다. 오늘 아침에 서리가 내렸다, 나라면 한 문장으로 끝내고 말았을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어르신들은 오래도록 이야기꽃을 피우셨다. 호박이 얼었어, 감나무 잎은 푸르던데?, 아직 감잎은 제법 남았어, 와 같이 자연과 함께 생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해낼 수 없는 색다른 표현이 오가는 동안 나는 날씨를 말할 수 있는 표현이 이토록 풍부하던가 새삼 감탄했다.

  오늘이 첫서리야.
  서리가 내리기 전에 감을 다 따야 돼, 감이 얼면 곶감을 못 만드니까.

  날씨를 덥다, 춥다, 맑다, 비가 온다 정도로 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나는 이 모든 게 새롭기만 했다. 대화에 귀 기울이는 동안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했고, 어르신들도 시장으로 시내로 뿔뿔이 흩어지셨다.

  버스가 아니었다면 어르신들의 맛깔난 대화를 이렇게 가까이서 들을 기회가 있었을까? 삶이 베어 나오는 구성진 표현들이 신기해서 나는 한동안 버스를 이용해 시내를 오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면 나도,
  어쩌면 나도,
  날씨를 말하는 나만의 언어를 가질 수 있겠지.
  붉은 잎을 책 사이에 끼우는 계절, 처럼.

  현지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걷는 걸음이 가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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