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29화
- 갈림길의 오른편
가을을 걷다
시골로 오면서 단출해진 것은 살림살이나 내 삶의 우선순위뿐만이 아니었다. 삶의 터전을 시골로 옮겨오며 그간 내가 알아왔던 사람들도 한 차례 정리가 됐다. 특별히 사이가 나빴다거나 의도적으로 인간관계를 단절하지 않아도 시골에서는 꼭 필요한 인간관계만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역이 가까이 있다지만 서울까지는 무궁화호로 3시간 남짓. 모든 사람을 만나러 서울에 수시로 갈 수는 없어서 꼭 필요한 일로만 서울을 오가다 보니 내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시간이 나서' 보는 사람들과 '시간을 내서' 보는 사람들로 나누어졌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나서' 나를 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시간을 내서' 나를 보러 여기까지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 한쪽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서로의 우선순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내게 중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느 정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자 드디어 집에 사람을 초대할 수 있게 되었다. 에어컨 없는 집에서 등목과 선풍기로 버티는 일은 우리야 어쩔 수 없다 손 치더라도 손님에게까지 권할 것은 못 되어서 한동안 우리는 손님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날이 선선해졌으니 손님을 초대해도 무리가 없을 터였다.
가을에 처음으로 우리 집을 찾아준 손님은 대학교 선배 언니. 집에서 역까지 2시간여, 무궁화를 타고 3시간 걸려 내려온 언니는 오는 내내 느린 기차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웃었다. 어디에 갈지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었으나 오래 간만에 도시에서 놀러 온 손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기를 원했다. 아무도 없고 너무도 조용한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그냥 푹 쉬고 싶은 그 마음을 나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앉아서 마당을 바라보다가 문득 산책을 가도 좋겠다 싶어서 신발을 대충 꿰어 신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얼마 전에 우연히 발견한 마을 오솔길 너머의 교회. 몇 차례 가 보았지만 아무도 본 적이 없었고 연못 위 연꽃이며 들판의 코스모스가 제법 가지런하게 피어있어서 언니와의 산책으로 딱 좋은 코스였다.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 초입의 키 큰 해바라기를 지나 석류나무가 있는 집, 진돗개를 여러 마리 키우는 집을 지나 한적한 오솔길로 들어섰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풀이 쓸리는 소리만 들려오는 길에서 우리는 소란스러운 도시의 카페에서 나누던 대화보다 훨씬 더 깊은 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솔길을 지나자 두 갈래로 갈라진 길이 나왔다. 이쪽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월류봉으로 오를 수 있는 산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한동안 밭이며 과일나무가 보이다가 교회가 나왔다. 주말마다 월류봉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있어 사람들이 제법 오가는 왼쪽 길과 달리 오른쪽 길은 근처 공장과 인접해 삭막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조금 걸어가 보면 방치된 땅 같이 보이기도 해서 얼핏 봐서는 들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에 남편과 개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왔을 때, 새로운 길로 가보자며 들어선 길에서 동화 속 풍경 같은 교회를 본 것이다.
입구는 이래도 가보면 멋진 풍경이 있어요, 하고 언니와 함께 오른쪽 길로 걸었다. 돌아갈까, 싶은 마음이 들 때쯤 흔들리지 말고 조금 더 걸어가면 멋지게 펼쳐진 돌산의 풍경과 함께 그 아래 나무로 지어진 자그마한 교회 건물이 보였다. 그 앞으로 넓은 호수와 호수 위 연꽃잎이 바라보기만 해도 차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칠면조며 거위, 닭이 돌아다니는 언덕과 그 옆을 지키는 개들이 보였다.
코스모스를 따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그때, 어디선가 하얀 말티즈 한 마리가 나타나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묶여 있는 다른 개들과 달리 풀려있는 데다 옷까지 입고 있는 녀석은 누가 봐도 주인이 있는 강아지였다. 강아지는 우리를 졸졸 따라오다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교회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총총 달려가는 강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강아지 주인이 불쑥 우리에게 차를 마시고 가라며 손짓을 했다.
언니도 나도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어쩔까, 고민하다가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교회 안은 제법 크고 넓었다. 알고 보니 우리에게 차를 권하신 분은 이 교회를 짓고 목회를 하시는 분이었다. 부부가 함께 시골로 내려와 교회를 짓고 종교활동을 하고 계시다고 했다. 타 주신 커피 한 잔과 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마셨습니다, 하고 돌아서려는 내 손에 목사님이 검은 봉지를 걸어주셨다. 열어보니 마당에서 농약 없이 키우신 거라는 아로니아 한가득과 칠면조 알 몇 개가 들어있었다. 유기농 먹거리까지 챙겨주시니 무척 감사했다.
운동삼아 나갔던 산책에서 오히려 다과를 잔뜩 얻어먹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언니는 뭔가 정말 시골스러운 분위기가 난다며 웃었다. 집에 도착해서 아로니아 열매를 물에 씻어 채반에 말렸다. 씻는 과정에서 여러 번 벌레가 나와 유기농이로구나, 생각했다. 식초물에 아로니아를 담가 뒀다가 말리면 벌레를 없앨 수 있다는 걸 아로니아를 모두 말린 후에야 알아버려서 다음번에는 꼭 식초물에 열매를 담가놓기로 마음먹었다.
선선한 바람, 높은 하늘.
마당에는 아로니아가 말라가고, 냉장고 안에는 칠면조 알.
이런 삶을 살게 될 줄 몰랐지만 나는 지금의 내 삶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아로니아에 물기가 마르면 식초를 담가야지, 그러고 남은 아로니아는 우유와 함께 갈아서 먹어야지. 까맣게 보일만큼 짙은 아로니아의 보랏빛으로, 저녁 하늘이 몰려오고 있었다.
며칠 뒤 삶은 칠면조 알은 달걀과 오묘하게 다른 맛. 식감이 쫀득쫀득하고 따로 간을 하지 않아도 짭짤하니 맛이 있었다. 하얀 강아지를 따라간 곳에서 칠면조 알을 얻어온 이야기가 어쩐지 동화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마지막 남은 알껍질을 톡,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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