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30화
- 여기는 감고을
감 떨어지는 계절
언제부터인가 퉁! 퉁! 하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려왔다. 퉁, 퉁 할 때마다 우리 집 강아지들이 왈왈 짖는 소리가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담 앞까지 걸어가서 어디서 소리가 나는 걸까, 살펴보았다. 강아지들이 쭐래쭐래 따라와 왈왈 짖었다.
소리의 정체는 감.
나무에서 떨어진 감이 슬레이트 지붕과 부딪히면서 퉁, 퉁 소리가 난 것이었다.
영동군은 '감고을'이라는 수식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만큼 감나무가 많은 곳이다. 처음 영동군에 왔을 때 어딜 가나 빠지지 않고 있는 잎이 반질반질한 나무가 뭘까 싶었는데 가을이 되어서야 그 나무들이 모두 감나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가로수가 모두 감나무라니, 정말 컬처쇼크(!)가 아닐 수 없었다.
감나무를 왜 이렇게 많이 심었는가 하면 감나무는 우리나라 기후와 풍토에 알맞은 종으로, 생장이 빨라 5~6년생부터 열매를 볼 수 있고 열매와 잎의 쓰임새도 다양해서 아주 옛날부터 유용했다 한다. '집 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배곯을 일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감나무가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존재였는지 알 만하다.
그중에서도 영동군은 감 재배를 특히 많이 하는 지역으로, 40년 전에는 감과 곶감을 특산품으로 내놓았을 만큼 감 생산과 가공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지금은 특산품이 포도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감나무는 영동군의 상징으로 남아 몇 년 전에는 군에서 주도적으로 감나무 가로수길을 조성하기도 했다.
아무튼 그래서 영동군에는 감나무가 무척 많다. 물론 내가 사는 황간면도 예외가 아니다. 주홍빛 등이 한가득 걸린 나무를 골목에서, 산에서, 강변으로 가는 산책로에서 볼 수 있었다. 가을의 새파란 하늘과 주홍빛 감이 대비되면서 하늘은 더 푸르게, 감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지금 이 계절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한꺼번에 호롱불을 밝히는 감나무를 보며 이것이 이곳의 가을이구나, 생각했다.
감이 본격적으로 떨어지자 온 마을에 분주한 공기가 돌았다. 여기저기 감이며 홍시가 떨어져 있고 집집마다 감을 따거나 깎거나 말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둥글게 잘 깎은 감들이 곶감 걸이에 걸려 지붕 밑이나 마당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진풍경.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른 풍경이었다. 시내에 가도 가게 여기저기 감이 달리고 심지어 영동역에까지 감이 걸린 모습을 보며 이곳 사람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한 감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집 마당에 감나무가 없는 우리는 산책 때마다 길에 떨어진 감을 소심하게 주워와 가을 기분을 냈다. 평소 특유의 떫은맛 때문에 감을 잘 먹지 않는 나였지만 도처에 먹을 것(?)이 널려있으니 슬쩍슬쩍 줍게 되었다.
주인이 있는 나무에서 떨어진 감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마을 어르신으로부터 감을 따가는 건 안 되지만 떨어진 감을 줍는 것은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떨어진 홍시를 호로록 드시기도 하셔서 그 뒤로는 죄책감 없이 떨어진 감을 마음껏 주웠다.(나는 원래 길에서 뭘 줍는 걸 좋아하는데 시골에 와서는 사철 주울 것이 생겨 늘 분주하다. 이런 내게 남편은 '프로줍줍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터질까 조심스럽게 가져온 감을 식탁 위에 두고 가을의 빛깔을 감상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감색, 참 곱다. 아주 붉지도, 아주 옅지도 않은 빛깔. 노을을 닮은 이 빛깔을 다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니 감빛, 이라고 말할 밖에.
이곳의 가을을 나는 몇 번이나 더 날 수 있을까?
감빛이 잦아드는 나무를 보며 나는 말랑하게 잘 익은 홍시 하나를 호로록, 입 속에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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