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31화
- 감을 말려요
결국 나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안 할 줄 알았다.
길을 걸으며 집집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매달아 놓은 감을 볼 때에도, 장날 시내에서 몇 걸음 떼기가 무섭게 가게마다 곶감 걸이며 필러(감자 깎는 칼)를 팔고 있는 풍경을 볼 때에도 나는, 나만은 감을 깎는 일이 없으리라 믿었다.
감을 깎고 말려 먹을 만큼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 주위에서 대봉이며 단감을 종종 나눠주시니 있는 감을 먹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게다가 감을 하나하나 깎아서 썰어서 말려서……. 겨우 말린 감을 먹자고 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연일 감으로 축제를 벌이는 듯한 마을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감을 깎지 않겠노라, 매달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도 고무장갑을 끼고 앉아 열심히 감을 깎고 있었다.
마음이 바뀐 것은 정말 사소한 일 때문이었다.
산책길에서는 주로 홍시를 많이 주워오는 편인데 그날따라 단단한 단감을 주워와 이리저리 굴려보던 게 시작이었다. 맛있을까? 감 특유의 그 떫은맛, 나는 정말 싫은데. 땡감이면 어떡하지? 놔두면 홍시가 되려나? 버리고 와야 하나? 아, 버릴 바에야 한 번 말려보자. 다들 저렇게 말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단감 하나를 깎은 뒤 썰어 건조판에 간격을 두고 하나씩 올려놓았다. 햇빛이 드는 곳에 두어야 한다, 반음지에서 말려야 한다, 놔두는 장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해 마당에 건조대를 펴서 그 위에 감을 말렸다.
며칠이나 말렸을까, 옥상에 올라가 보니 감 테두리 부분이 살짝 투명해져 있었다. 만져보니 딱딱한 듯 말랑해서 이 정도면 된 건가 싶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베어 문 그 순간 쫄깃하면서도 달큼한 맛에 나는 완전히 반해버렸다.
나는 감말랭이를 이곳에 와서 처음 봤다. 곶감이나 단감, 홍시, 반시는 알았지만 감말랭이가 있다는 건 몰랐다. 막연하게 감을 말리는 건가 보다 했지 맛에 대해서는 상상해보지 않았는데 직접 먹어보니 젤리를 먹는 것처럼 질기면서 달았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고 100% 감만 말렸으니 그야말로 천연 젤리인 셈이었다.
감말랭이에 꽂힌 나를 본 남편은 감을 사서 말려보자고 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간식거리를 만든다고 생각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 길로 우리는 시장으로 달려가 감을 사 왔다. 무려 20kg를. 감 대여섯 개를 말려보려고 한 것인데, 시장에서는 박스 단위가 아니면 좋은 감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감 종류가 그렇게 많을 줄은! 용도별로 적합한 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아저씨의 추천을 받아 감말랭이나 곶감을 만들기 좋다는 호박 감을 사 왔다. 20kg를 다 말릴 수는 없으니 오는 길에 곶감 걸이를 사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에 필러가 있지만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필러도 하나 골랐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감을 하나씩 집어 깎았다. 조용한 집안에 사각사각, 감 껍질 벗기는 소리만 들렸다. 이대로라면 놀이가 아닌 일이 되어버릴게 분명했다. 일단 시작한 것은 끝을 내야 하는 나와 남편은 평소에는 대개 여유 있게 생활하다가도 목표가 생기면 달성할 때까지 맡은 바에 충실한 팀워크를 자랑했다.
그러다 보니 재미로 시작한 일이 고된 노동이 돼버린 적도 적지 않았다. 심심하니까 집을 좀 치워보자, 하다가 밤새도록 가구를 들어내고 가구 배치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식이었다. 웃음기를 싹 빼고 진지한 표정으로 일을 끝낸 뒤에야 서로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모습은 애정이라기보다는 의리에 가까웠다.
아무튼 이대로라면 감 깎기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컸다.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면 계속 떠들어야 하는데 24시간 일주일 내내 붙어있는 우리에게 대화란 그저 공기 같은 것일 뿐. 뭐랄까, 특별히 할 말이 없었다. 우리를 쉴 새 없이 떠들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 남편이 인스타그램에 있는 라이브 기능을 사용해보자고 제안했다. 좋은 해결책이었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계속 이야기를 하게 될 테고, 우리 둘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줄 수도 있었다. 스마트폰을 가져와 테이블 앞에 고정시키고 On air. 손은 감을 깎으면서 입은 말을 쏟아냈다. 처음이라 양쪽 다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몇몇 사람이 들어와 반응을 해주니 신이 났다. 두서없이 감을 깎아서 말랭이로 만들 거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주제는 자연히 시골생활로 넘어갔다.
그중에서도 재미있었던 것은 단연 버섯 이야기. 남편이 마을 주민에게 듣고 온 이야기였다. 산이 많은 시골에는 버섯도 많이 자라는데, 돈이 되는 비싼 버섯을 따려면 경쟁이 치열하단다. 때문에 버섯으로 돈을 벌려면 좋은 버섯을 노리지 말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잡 버섯(?)들만 잔뜩 캐는 게 차라리 낫다고 하셨단다. 틈새시장을 노려라, 경험에서 우러난 진솔한 조언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감 박스가 금방 비었다. 이제 몇 개는 곶감 걸이에 걸어 말리고, 나머지는 모두 썰어 채반에 올려놓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도 주렁주렁 감이 달렸다. 그 사이 해가 져서 밖은 어둑어둑했다. 라이브 방송을 종료하며 우리는 조만간 또 다른 방송(?)으로 돌아오겠다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을 2편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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