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24화
- 월류봉에 올랐다
변한 것은 산이 아니라
나와 남편은 많은 부분에서 닮았고 또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부부라고 해도 결국은 다른 사람이니까, 지극히 당연한 일. 우리 역시 관심사나 취미, 개그코드는 맞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집에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편과 달리 나는 대략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어딘가를 다녀와야 잠이 잘 오는 사람이라는 것.
잠시라도 나가 바람을 쐬고 오는 것이 나에게는 휴식이다. 하지만 남편에게 그것은 또 하나의 일정일뿐 쉬는 것이 아니었다. 쉬는 방법이 극명하게 다르니 우리는 이 문제로 자주 부딪혔다. 연애 시절부터 이 문제로 거듭 갈등을 빚었는데 한 걸음 먼저 물러서서 해결책을 찾은 것은 남편이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주기적으로 나들이를 가는 편을 택한 남편은 언젠가부터 멀리 가지 않고 최고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황간에 오고 나서도 그랬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 온 뒤 남편은 근처도 둘러볼 겸 영동군 황간면의 명소를 찾아내고는 내 낯빛이 흐려질 때마다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처음 가게 된 곳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월류봉’이었다.
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라는 뜻의 월류봉. 집 근처에 경치가 좋은 산이 있다고 해서 어느 화창한 날,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는 집을 나섰다. 등산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나였지만 그래도 집 근처에 있는 산이니까 한 번 정도는 올라가 봐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월류봉으로 향하는 오솔길로 접어들자 길목에 늘어선 나무마다 산악회의 이름이 적힌 색색의 리본이 매달려있었다. 길에는 우리 밖에 없었지만 이곳에 오갔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큰 개를 여러 마리 키우는 집이 하나 보였고 그 옆으로 월류봉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보였다. 신발 끈을 단단히 매고 산을 올랐다.
재잘거리며 산을 오르던 우리는 몇 분 후 우리는 왜 이곳의 이름이 ‘산’이 아닌 ‘봉’인지를 온몸으로 깨달았다. 집에서 멀지 않다고 해서 동산쯤을 생각한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아뿔싸 여기는 산이 아닌 봉우리. 그래서인지 아주 가팔랐다.
하지만 이러다 말겠지 생각한 우리는 끊임없이 길을 계속 올랐고, 이 봉우리는 우리가 오를 봉우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순간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정상에 가까워진 후였다. 혼자였으면 애저녁에 포기했을 길이었지만 둘이라서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는 말이 턱 아래까지 차오를 때마다 월류봉은 쉴 곳을 내어주며 우리를 정상까지 오르게 했다.
한반도를 닮은 풍경이 펼쳐진다는 제1봉에 올라서자 우리나라 지도를 꼭 닮은 산과 그 산을 휘둘러 흐르는 강이 보였다. 산과 강을 따라 작은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네모난 논과 밭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가까이서 보았을 때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풍경, 그러나
변한 것은 산이 아니다.
산은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인데 시선이 머무는 곳이 달라졌을 따름이었다.
문득 내 옆에 선 사람을 떠올렸다.
연애 때나 결혼 후나 남편은 변함이 없었다. 답답해하는 나를 위해 언제든 떠날 만한 곳을 알아두는 것조차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새삼스럽게 그런 마음이 고마워진 것은 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연애 때에는 그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온전히 다하지 못했다. 같이 있는 동안 즐겁고 행복하면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두 번의 이별과 재회를 겪고 나서는 사랑이 더더욱 약점 같았다. 최선을 다해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스스로가 가장 소중한 인간이라 한편으로는 당신 없는 미래를 홀로 살아갈 내가 가장 걱정스러웠다.
혼자 남을 순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당신이 내게 주는 마음을 재고 따지고 계산했다. 조금이라도 내가 더 많이 주고 있다고 생각되면 마음을 다잡았다.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더하고 빼서 꼭 내가 받은 마음 그만큼만 돌려주자고 마음먹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많은 것이 변했다. 이제 웬만한 일로는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면서부터 나는 이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 믿음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태생이 의심 많고 경계 심한 인간이라 결혼한 지 일 년이 흐른 지금에야 조금쯤 마음을 놓는다. 이제 가족이라 당신이 내게 준 모든 것을 당연스레 여기겠다는 게 아니다. 내 행복을 위해 당신의 삶을 희생시키겠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저 나는, 이제야 당신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령 그 말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으로 족하게 되었다고, 그러니까 당신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좋을 때는 마냥 좋지만 그런 순간들만 있지 않다는 걸 아주 조금은 아는 나이가 되었다. 분명 우리에게도 힘든 날들이 찾아오겠지. 그게 바로 내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좋은 날보다는 좋은 날을 맞기 위해 견뎌야 하는 날이 더 많은 것, 말하자면 등산과 같은 것이 인생인 것 같으니까. 나는 이제 매 순간 우리가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라기보다 힘든 순간에도 서로가 서로를 지지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오를 때처럼 서로를 위해, 다만 언제나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받은 마음을 정확히 셈해 돌려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이제는 안다. 말재주가 없어 글로 밖에 쓰지 못하는 나를 세상 누구보다 잘 아는 당신, 그런 당신을 최선을 다해 사랑할게-
그렇게 생각하면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집에 도착한 나는 그 뒤로 다시는 월류봉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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