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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14 상추를 다듬는 시간

by 구루퉁 2023. 1. 21.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14화
- 상추를 다듬는 시간

상추대란

  그러니까 이런 상황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씨만 뿌려두고 간간이 살펴 물을 주는 일 외에는 거의 돌보지 않은 상추가 이렇게나 잘 자랄 줄이야. 할머니께서 한 이랑 가득 상추 씨앗을 뿌려주실 때만 해도 ‘아, 저렇게 씨를 잔뜩 뿌려주시는 걸 보니 발아율이 높지 않은가보구나’하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상추의 자생력은 대단했다.     

  어느 날부터 잡초들 틈으로 상추 싹이 조금씩 올라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파릇파릇 자라나 이랑을 뒤덮기 시작했다. 단언컨대 잡초급의 성장 속도였다. 생각보다 무서운 기세로,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기는 했지만 애초에 먹으려고 심은 씨앗이니 싹이 잘 자라 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작업용 장갑을 끼고 텃밭에 나가 먼저 자라난 상추부터 순서대로 뽑아왔다. 겹쳐진 잎사귀들을 헤치고 아래쪽 줄기를 잡아당기면 따면 상추가 뿌리 째 뽑혔다. 상추 뿌리가 보기보다 흙을 꽉 쥐고 있어 손목에 조금 힘을 실어 따야 했다. 힘 조절에 실패하면 상추 잎만 뚝뚝 떨어졌다. 안 해본 일을 하려니 이것도 일이라고 팔목이 뻐근했다. 평생 별다른 고생이라곤 없이 살아온 내 몸뚱이를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걱정과는 달리 무서운 속도로 자라기 시작한 상추. 한동안 우리는 상추를 원없이 먹으며 내년에는 조금만 심자고 다짐했다.

  쪼그려 앉아한 바구니 가득 상추를 따는 걸로 끝이 아니었다. 상추를 흙에서 뽑는 과정은 시작에 불과했다. 상추를 먹기 위해서는 아직 몇 가지 과정이 더 남아있었다. 먼저 이 많은 상추를 다 씻어서 손질해야 했다. 커다란 대야에 상추를 나눠 담아 물로 씻어냈다. 씻는 동시에 가위로 상추 뿌리를 잘라내고 시든 잎을 솎아냈다. 한바탕 손질한 상추는 채반에 올려 물기를 뺐다.     

  상추를 수확하는 과정보다 씻어내고 손질하는 과정이 더 손이 많이 갔다. 지난주쯤 할머니께서 잘 다듬어진 상추 한 봉지를 주셨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직접 상추를 심고 뽑고 씻어보니 보통 손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직접 기른 상추를 준다는 것은
  상추를 심고 뽑고 씻어서 다듬는 그 모든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로구나.     

  할머니가 커다란 봉지에 넣어주신 상추만큼 넉넉한 마음이 새삼 따뜻하게 느껴졌다. 온 주방에 물을 튀겨가며 요란하게 상추를 씻고도 아직 텃밭에는 상추가 가득. 내년에는 지금의 반 정도만 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상추 잎에 붙어있던 달팽이를 텃밭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그렇게 상추를 다듬는 시간은
  흙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텃밭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나의 일상 속에 더하는 싱그러운 시간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상추를 따고 손질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상추를 먹어치우는 속도가 상추가 자라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처음 며칠간은 할머니의 말씀대로 상추 겉절이를 해서 반찬으로 먹었다.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내가 겉절이를 맛있게 만들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인터넷에 방법을 검색해보니 의외로 간단했다. 간장과 식초, 설탕, 고춧가루를 적당히 섞어 맛을 낸 뒤 상추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무쳐내면 새콤 달콤 입맛을 돋우는 겉절이가 완성됐다.     

  한동안 냉장고 한편을 가득 채운 상추를 먹어 없애기 위해 상추 요리법을 찾고 개발하고 먹을 수 있는 대부분의 요리에 상추를 곁들여 먹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제육볶음을 먹을 때 상추와 함께 먹는가 하면 상추를 먹기 위해 삼겹살을 사 와서 구워 먹었고 샐러드를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 때 맨 아래쪽에 상추 잎을 깔아 아삭함을 더하기도 했다.     

  우리 밭에서 자란 상추 잎은 여리고 순해서 대부분의 요리와 잘 어울렸다. 상추 손질이 아무래도 미숙했던지 가끔 돌이나 흙이 씹히기도 했지만 정신없이 상추며 텃밭에서 자란 채소들을 먹는 동안 야채 값이 올랐다는 도시의 뉴스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우리 집을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상추 요리를 대접하고 돌아가는 길에 상추를 한 아름 안겨주기도 했다. 내가 키운(씨만 뿌리고 텃밭이 다 한) 상추를 받은 엄마는 보통 엄마가 딸한테 재배한 채소를 주는데 우리 집은 거꾸로 된 것 같다며 웃었다.   

  상추 대란이 이어지며 다듬어 두었던 상추 잎이 물러지는 일도 생겼다. 알고 보니 상추를 오래 보관하려면 물에 닿지 말아야 했던 것. 잎에 물을 묻히지 않은 채로 신문지에 싸서 지퍼백에 포장한 뒤 냉장보관을 하면 한 달 이상도 보관이 가능하니 상추가 많을 때는 한 번에 씻어 손질하기보다 소분해두고 그때 그때 필요한 만큼 씻어 먹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상추 대란으로 깨달은 나는 아직도 텃밭을 가득 덮은 상추를 보며 저 많은 상추를 신문지에 싸서 보관할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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