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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38 겨울유희

by 구루퉁 2023. 2. 20.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38화
- 겨울유희

소나무, 호수 그리고 별


겨울, 무얼 하며 지낼까-? 이래도 춥고 저래도 춥다면 재미있게 춥자!


  집이나 밖이나 추운 건 매한가지. 그렇다면 나가서 바람이라도 실컷 쐬자.
  그동안 리스트에 올려두었던 곳에 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영동에서 나름 유명한 송호관광지. ‘송호’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소나무와 호수가 있는 곳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관광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름 한철, 장사를 했을 것 같은 포장마차와 캠핑장만 그저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조금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지만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우리는 이곳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솔잎이며 솔방울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키 큰 소나무가 꽤 많았는데, 걸음을 옮기자 울창한 소나무 사이사이로 햇빛이 새어들었다. 희미하게, 솔잎향이 났다.

 

 

  이런 소나무 숲을 강릉에서 본 적이 있다. 숲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었다. 언젠가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가까이에 소나무 숲이 있었을 줄은.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옷을 껴입었는데도 추웠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추워서인지,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지, 우리는 어쩐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는데 손을 잡고 걸어본 건 새삼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손을 잡고 함께했던 여행들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부산, 남해에서부터 스페인, 이탈리아까지. 길을 잃어 잘못 들었던 골목, 우연히 마주친 길고양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앞에 두고 잠깐 낮잠을 잤던 잔디밭, 벚꽃과 바다 풍경까지 문득 스친 풍경들이 말을 걸어왔다.

  우리 두 사람, 참 많은 시간을 함께 걸었구나. 많은 말들로 나를 설명했던 시간이 지나고, 이제 우리는 말하지 않고 걸어도 서로의 기분을 안다. 어쩌면 말로 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소나무 숲 아래. 함께 걸은 풍경들이 늘어가고, 두 사람은 말도 없이 깊어가고.

  조금 더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영동과 인접해있는 옥천으로도 마실을 다녔다.


  호수 풍경을 볼 수 있는 홍차 가게에서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딘가로 짧은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에서 얻은 기분으로 나는 또 며칠을 살 수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별구경만 한 것이 없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검은 하늘에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시골에서는 별이 무척 잘 보였다. 나보다 남편이 별을 좀 더 좋아했는데, 그러다 보니 남편은 하늘이 어두워지면 별이 얼마나 많이 보이는지를 확인한 뒤 내게 알려주곤 했다.

 

 

  별이 유난히 많은 날이면 옷을 겹겹이 껴입고 차를 탔다. 1시간쯤 달려가면 사람들이 별을 보러 자주 찾는 도마령이 있었다. 도마령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굽이굽이 휘어져 내려가는 길이 보였다. 엄청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을 찾는 사람도 많았다.

  도마령에 처음 왔던 날을 기억한다. 우리 둘 뿐인 도마령은 적막했고 짙푸른 하늘에는 별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별을 보다가 눈을 감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세상에 오롯이 나 혼자 남은 것처럼.

 

 

  그 뒤로도 도마령은 적막했다. 아무 소리도 없는 세상은 무섭고도 안온했다. 별이 너무 총총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애써 고개를 들어 별과 별을 이어보았다.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처럼 별똥별이 흘러내렸다.

  몇 번이고 별똥별이 떨어지는 걸 보며 나는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했지만 집에 와서 알아보니 그 날은 진짜 유성우가 내리는 날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휙-하고 지나가는 그 빛이 별똥별이었다니. 소원이라도 빌 것을.

  그 후로 도마령에 갈 때마다 별똥별이 내리는지 살피곤 하지만 아직까지 그날 외에는 그런 광경을 본 일이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한 것도 잠시, 시골에서 겨울을 난지 대략 3개월 만에 가계를 정산해보니 한 달에 들어가는 난방비만 40만 원+a. 여기에 생활비는 별도니 다른 계절에 비해 여유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통장이 가벼워 몸도 추운데 마음까지 추웠다. 아무리 즐겨보려 해도 추위는 추위. 게다가 잔고가 줄어가는 통장에 마음까지 시리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시골집의 웃풍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기름보일러를 하루 종일 떼도 배관이 낡아 바닥만 찔끔 따뜻해질 뿐 집안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차라리 손바닥만큼 드는 햇볕 아래가 더 따뜻할 정도니 우리는 40만 원을 내고 동파를 막기 위해 보일러를 돌리는 격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를 가던지, 여행을 가던지. 상황이 절박하니 말도 안 되는 대안도 그럴싸하게 들렸다.

  지도를 펴고 앉아 진지하게 여행 계획을 짰다. 계산해보니 정말 그 돈이면 태국 정도는 갈 수 있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추운 것 보다야 차라리 더운 게 낫다는 마음으로 우리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계획은 20박 21일. 1월 한 달간을 태국에서 보내고 오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의 태국여행이 갑자기, 아주 뜬금없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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