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36화
- 동백이 피기까지는
다 나쁠 수 없는 것
겨울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세상이 계속 추워질 것 같았다. 지구 전체가 빙하와 바다로 뒤덮이는 상상을 하며 그렇게 된다면 펭귄을 만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역시 인생에는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지금 모든 것이 다 나쁜 것 같은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도 뭔가 좋은 것이 있는 걸까? 다 나쁠 수 없는 거라면, 뭐 하나라도 좋아야 할 텐데.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겨울의 좋은 것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찾아보았다. 귤과 만화책은 이미 기본 옵션.
눈 덮인 풍경을 실내에서 보는 일도 퍽 운치 있고 티 워머로 데운 홍차를 마시는 시간도 좋다. 강아지들과 눈길을 산책하는 것도 겨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작은 동백 화분을 보았다. 몇 달 전에 남편과 시내의 목욕탕에 갔다가 동백 화분을 가지고 싶어 산 화분이었다. 단단해 보이는 초록색 잎으로 감싸져 봉우리만 있었던 동백이 천천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초록 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분홍색 꽃잎이 뾰로통한 아기 입술 같았다. 그 모양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동백(冬柏)은 겨울에 꽃이 폈지, 참.
사놓고도 잊었던 터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신경을 안 써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거라 마음을 달랬다.
한동안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동백을 봤다. 동백이 얼마나 더 피었는지, 다른 봉우리의 상태는 어떤지, 며칠째 저 상태에서 열리지 않고 있는데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를 살피며 동백이 피어나기를 기다렸다. 동백을 기다리는 것은 메추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동백은 느리고 고요하게 개화했다. 육안으로는 지금 동백이 피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동백이 자신만의 리듬으로 오고 있는 중일 거라고 믿기로 했다.
그러니까 동백은 더딘 게 아니었다. 누구도 동백에게 더디다 말할 수 없었다.
동백은 그저 '쿵 짝짝 쿵 짝짝', 혹은 '쿵짝쿵 짝짝 쿵쿵'의 자신의 리듬을 지키며 오고 있는 것뿐.
동백은 어느 날 갑자기 꽃을 피웠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우리가 눈을 뗀 사이 훌쩍 큰 느낌으로, 동백꽃은 내 시야에 불쑥 들어왔다. 붉지만 요란하지 않은 빛깔로- 아침에 거실로 나가니
동백꽃이 거기에 있었다.
정말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동백꽃이 몇 송이 더 피고 난 뒤에는 빛을 충분히 받도록 창문 바로 앞에 놓아주었다. 그 옆은 율무의 지정석. 율무는 여기서 바깥의 동태를 살피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 위치에 화분을 갖다 두었더니 자연히 율무를 볼 때 동백꽃을, 동백꽃을 볼 때 율무를 보게 되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얀 강아지와 빨간 꽃의 조합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 장면-율무와 빨간 꽃이 나란히 있는-을 바라보는 시간이 점점 늘었다.
호기심이 많은 율무는 꽤 자주 자기 옆에 있는 과묵한 친구의 냄새를 맡았다. 율무의 얼굴이 꽃과 정면으로 마주친 것 같을 때는 어쩌면 저 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둘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분명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율무.
"햇빛을 보는 건 참 기쁜 일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율무가 물어보면 동백꽃은 동의의 의미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율무는 슬퍼하지 않는다. 율무에게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과묵한 친구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율무는 말한다.
"우리 제법 잘 맞는 것 같아."
왠지 그런 대화가 오갈 것 같은 모습.
강아지와 동백꽃, 마주칠 뿐 부딪지 않는, 아주 낯선 존재들의 마주침-
그렇게 겨울은 흐르고 율무는 자란다.
동백꽃은 질 때, 잎잎이 흩어지지 않고 송이째 추락한다.
중간을 용납하지 않는 단호함. 그런 동백꽃을 나는 사랑한다.
그리하여 이 조그마한 동백 화분이 내 겨울의 '다 나쁠 수 없는 것'.
동백이 있어 이 추위도 견딜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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