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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37 차의 시간

by 구루퉁 2023. 2. 18.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37화
- 차의 시간

차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다


따뜻한 커피 위에 부드러운 크림, 그리고 초콜릿 한 조각. 오롯이 나만을 위한, 차의 시간.


  교복 입던 시절, 내게 커피란 500짜리 레쓰비 혹은 700원짜리 조지아 커피였다. 적당히 달달하면서 씁쓸한 맛, 커피는 다 그런 줄 알았다. 대학 시절에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처음으로 아메리카노라는 걸 마셨다. 물을 가득 채운 컵에 에스프레소 샷을 넣은 아메리카노는 다들 왜 그렇게 찾아먹는지 모를 만큼 다. 아메리카노 덕분에 무사히 졸업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스무 살, 그로부터 6년 후의 나는 카페인을 연료로 글을 쓰는 사람이 됐다. 달라진 것은 카페인의 범위가 커피에서 홍차로까지 넓어졌다는 것뿐.

  도시에서는 주로 커피를 사서 마셨다면 시골에 와서는 아무래도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다.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과 드립 커피, 더치커피 기구를 갖춘 남편 덕에 그날그날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더욱더.

  집중이 되지 않을 때,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휴식이 필요할 때... 많은 순간 차는 나의 시간을 향기롭게 채워주는 삶의 활력소였다. 이것은 시골에 온 1년 간 혼자, 또 같이 마셨던 차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간단하고 깔끔하다는 이유로 아무래도 가장 많이 마시게 되는 건 커피, 그중에서도 아메리카노.

 

  때로는 옆집 할머니가 주신 호박 속을 파내 만든 샐러드 샌드위치와 함께,

 

  때로는 영동 시내에 당시 유일했던 마카롱 가게에서 사 온 마카롱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 문득 차를 한 잔 앞에 놓고 나면 그제야 하늘, 바람, 나무가 보였다. 
  도시를 벗어나 도시에서와 똑같이 살려는 내게 차는 시골생활의 느긋함을 일깨워주었다.

  이유 없이 울적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선물 받은 디저트에 우유를 듬뿍 넣은 더치라떼나
  휘핑을 한껏 올린 아인슈페너를 마실 것.

 

  우울하고 힘없을 땐 달달한 커피만 한 위로가 없다.

  어딘가로 나가고 싶은 날엔 가까운 카페로. 장소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된다.

 

  자주 갔던 카페, 카푸치노나 티라미수라떼 같이 부드러운 커피를 앞에 두고 주로 브런치를 썼다.

 

  이제야 말하건대
  브런치를 미루지 않고 꼬박꼬박 쓸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의 따뜻한 커피 덕분이었다.

  데이트 기분을 내고 싶을 땐 월류봉으로 드라이브를 하고 가까운 카페에서 차 한 잔.

 

  코끝이 살짝 시린 날엔 카푸치노를 마시는 습관이 있다.

 

  아인슈페너가 있는 카페를 발견하면 무조건 시켜본다.

 

   스케줄러를 뒤적이며 일 년의 길이를 재어본다. 일 년이 길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혼자서 마시는 차는 책과 함께

 

  집중해서 일을 할 땐 잘 일어나지 않는 편이라 미리 차를 한 잔 만들어둔다. 물론 차를 타 두고 앉아 글을 써도 산만한 날은 있다. 비율로 치면 산만한 날이 집중하는 날보다 많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라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알 수 없으니까, 차를 미리 타둔다.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면서. 카페인이 없는 연잎차로 마음을 차분히 하는 나만의 의식.

 

  누군가 놀러 온 날이면 테이블 위가 화려해진다.
  친구가 도시에서 사 온 빵에 어울리는 크림 커피 한 잔.

 

  청을 담았다며 나눠준 친구도 있었다. 새콤달콤 겨울에 정말 딱이었던 딸기 레몬차. 나를 잊지 않고 챙겨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두통에 로즈마리가 좋다는 말을 듣고 집에 있는 로즈마리를 꺾어 뜨거운 물에 우려 보았다.
 플라시보 효과인지는 몰라도 정말 두통이 가라앉는 기분. 뜨거운 물에 타면 로즈마리 향이 더 강해진다.

 

  주변에 꽃이 지천이니 심심할 때 따 두었다 말리거나 덖는다. 개나리차와 목련차, 그리고 동백차.

 

  꽃차,
  그 계절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

  나에게 차를 마신다는 건 일상에 점 하나를 찍는 것이다.
  문장이 끝나면 점을 찍듯이.
  이야기가 이 점으로 끝일지, 아니면 시작일지를 결정하는 건 나 자신이다. 마음이 분주할수록 잠시 내려놓고 점을 찍는 시간이 필요하다.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 않게.

 

  인생을 살아가며 맞을 숱한 선택들 앞에서 나는 차를 마실 것이다. 그 순간 나에게 최선일 수 있도록.

  차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도 곧 일 년, 그간 마주했던 찻잔을 떠올리며 나는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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