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39화
- 겨울의 끝자락
마지막이 되면 처음을 생각한다
한국에 도착했다.
익숙한 공기, 익숙한 풍경. 이 나라를 딱히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만 이곳이 그리울까.
이런저런 생각도 잠시,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집에 들러 차를 몰고 강아지들을 데려왔다. 그 사이 강아지들은 털이 북슬북슬해져 있었다. 새삼 시간이 흘렀다는 걸 실감했다. 우리가 언젠가 올 줄 알았다는 듯 격렬하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들과 함께 네 식구가 집에 도착했다.
담장 너머엔 태국에서 주문한 택배가 벌써 도착해 있었다. 박스에서 하얀색 등유난로를 꺼냈다. 한파는 한풀 꺾였지만 아직 남은 한국의 겨울을 그 집에서 무방비하게 맞을 수 없다는 남편의 판단 아래 철저히 태국에서 이뤄진 쇼핑이었다. 해외배송이라 며칠이 걸린다고 해서 날짜를 계산해 우리가 도착하는 날에 택배가 오도록 해두었다.
가까운 주유소에서 산 등유를 채우고 난로를 켜보니 등유 냄새가 조금 나기는 해도 확실히 공기가 훈훈하게 데워져서 따뜻했다. 등유 냄새를 맡으니 아련하게 초등학교 교실의 풍경이 떠올랐다. 난로 위에 주전자를 얹어 보리차를 끓이고 고구마도 구워 먹을 생각에 행복해졌다.
여행의 끝에 늘 깨닫게 되는 것은 역시 내 집이 최고라는 사실.
율무도 집에 쏙 들어가 자기 냄새가 잔뜩 밴 담요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긴 여정을 마친 우리도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웠다. 내 침대의 편안함,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어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거실 카펫에 누운 후추와 율무가 보여서 아, 집이구나, 생각했다.
조금씩,
일상의 감각을 익혔다. 삼시 세 끼를 다 사 먹고 집 청소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호사도 이제는 끝. 내 손으로 밥을 지어먹고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집안일에 익숙해질 시간이었다.
한동안 걷지 않은 산책길을 걸었다. 시골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좀 더 잘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강이 녹아 물이 흐르고 돋아날 준비를 하는 씨눈이 나뭇가지마다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뉴스로, 스마트폰으로, 가게의 꽃 모양 장식으로 오는 봄 말고 진짜 봄이 천천히, 오고 있었다.
인적이 드물던 동네는 밭을 정리하는 사람들로 분주하고, 나누는 인사에는 활기가 넘쳤다. 이렇게 봄이 오는구나, 이곳의 봄은 이렇게 오는구나, 싶었다.
황간에서의 첫겨울은 혹독했다.
신고식이라도 치르듯 한파를 견디던 우리는 결국 도망치듯 태국으로 떠났고 날이 조금 풀린 뒤에 돌아왔다. 겨울. 모든 생명들이 몸을 잔뜩 웅크리는 계절.
겨울이 내게 가르친 것은 끝끝내 무엇이었을까.
봄 기분이 나서 그런지 그날 밤에는 조금 들떠서, 예전에 사둔 아이스와인을 조금 따라 홀짝였다. 홀짝이면서 글을 썼다. 노래 한 곡을 반복 재생해둔 채 썼다 지웠다 하다가, 문득 늘 우스갯소리로 남편에서 변했다고 말하지만 정말 변한 것은 나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늑한 주황 조명에 달콤한 와인, 발치에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강아지 두 마리-예전이었다면 두고두고 기억했을 이 모든 것이 이제 당연해진 나는 꿈꾸던 것들을 누리면서도 행복인 줄 몰랐다.
조그만 행복을 놓치며 자꾸만 큰 기쁨을 기다리고 있던 나.
진짜 변한 건 나였다.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아 태국에서 사 온 잔에 담긴 태국식 밀크티를 마셨다.
이번에는 우리도 텃밭을 한 번 일궈보자고 남편이 말했다. 그래, 좋아. 내년엔 인스타그램에 '농스타그램' 태그를 달 수 있을까, 싶다가 농사스타그램이 될지 농땡이스타그램이 될지 아직 미지수라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농땡이스타그램이 되지 않게 부지런히 들여다보고 가꿔서 유기농 먹거리를 생산해야지.
눈이 부셨다.
햇살이 잔설을 녹이고 있었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간다.
그래도 겨울은, 벌레가 없어 행복한 계절이었다-
...긴긴 겨울이 가나보다
이 계절이 그리워지려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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