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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43 자두의 시간

by 구루퉁 2023. 2. 25.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43화
- 자두의 시간

 황간의 길고양이들(3) 그 여름, 대추나무 아래


눈동자에 우주를 품은 고양이를 만났다. 이것은 보드랍고 따뜻했던 어느 여름날의 이야기. 자두가 붉게 익어가던 계절, 대추나무 아래 묻어둔 이야기.


  냐-냐-    

  소리가 들렸다. 들릴 듯 말 듯 끊어질 듯 말 듯, 작지만 분명하게 냐-냐- 하고 들려와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걸었다. 부엌에서 이어지는 뒷마당 옆 삼색이네 담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아무리 찾아봐도 무엇이 소리를 내는지 알 수 없어서 물건을 몇 개 쌓아 담을 넘어가 보니 풀숲이 우거진 발밑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냐냐, 울고 있었다.     

  외따로 떨어진 삼색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주 작았는데, 삼색이의 새끼들과 비교해보아도 더 조그마했다. 우리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울어서 급한 대로 손바닥만 한 고양이를 박스에 담아 동물병원으로 갔다.     

  주말이라 영동군에는 열려있는 동물병원이 없었다. 김천으로 향하는 동안 동물병원 몇 군데에 전화를 걸어 주말진료를 하는 곳을 찾았다. 작은 몸에 청진기를 대고 체온을 재보는 의사 선생님의 표정은 어두웠다.     

  새끼 고양이는 이미 체온도 심박수도 상당히 떨어진 상황이라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체온을 유지해주고 분유를 먹이는 것이 전부라고 했다. 체온과 심박수가 회복된다면 다른 검사나 치료를 해볼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도 고양이는 마냥 천진했다. 냐냐, 하는 소리가 여전히 또렷해서 곧 죽을 녀석 같지 않았다.     

  수건으로 고양이를 감싸고 분유를 사서 돌아오는 길, 6월의 하늘은 눈부시게 찬란했고 2017년의 그 어느 날보다 공기는 따뜻해서 이런 날 슬픈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우리는 서로에게 말했다. 손끝으로 고양이의 가느다란 숨을 느끼며 나는 이 아이에게 자두라는 이름을 붙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두가 붉게 익어가는 계절이니까, 다른 이름은 생각할 수 없었다.     

  에어컨도 켜지 않은 채 찜통 같은 차를 바람으로 식혀가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30분 동안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것만 같았다. 자두를 품에 꼭 안아 보아도 차디찬 몸은 데워지지 않았다. 가장 약한 새끼를 도태시켜 남은 새끼들을 지키는 고양이의 생리는 작디작은 생명에게 가차 없이 죽음의 그늘을 드리웠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자두의 울음이 멎었고 다시는 숨 쉬지 않았다.    

  텃밭 한가운데 있는 대추나무 아래에 자두를 묻었다. 화창하고 따뜻해서 먼 길을 가기엔  좋은 날이었다. 짧은 생에 행복한 기억 하나쯤은 있었기를 바라며 편히 가렴, 명복을 빌어주었다.     

 

 

 

 

  한 생명이 눈 감은 날, 뒷마당으로 한 줄기 빛이 비쳤고 그 빛 아래 삼색이와 새끼 고양이들은 여전히 평안했다. 어제와 같이 서로의 꼬리를 쫓아 뛰노는 새끼 고양이와 햇볕을 쬐는 삼색이.

  지금, 이 순간을 영원처럼 누리는 고양이들을 보면서 나도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이 생을 만끽하자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자두에게 먹이려고 사온 분유를 삼색이네 새끼들에게 타 주었다. 새끼 고양이들은 점점 더 멀리까지 나갔다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볕을 쬐라고 우리가 갖다 준 의자 위를 훌쩍 뛰어오르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고양이들이 돌연 취를 감추기 전까지 우리는 꽤 사이 좋은 이웃으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자주 보이던 삼색이와 턱시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새끼들도 소식이 없었다.

  뿔뿔이 독립했을까.

  다른 곳으로 옮겨갔을까.

  곧 돌아오려나.

  쫓겨난 건 아니겠지.     

  남편과 이런저런 추측을 해보았지만 시골에서 겪은 여느 일과 다름없이 우리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만 나의 여름을 아름답게 물들여준 이 작은 이웃들이 어느 곳에서건 고양이답게, 온전히 고양이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매일 맑은 물 한 그릇과 사료 한 그릇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마을 초입 분홍 낮달맞이꽃이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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