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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49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by 구루퉁 2023. 3. 4.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48화
-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메추리 프로젝트(2) 태어날 때까지 태어난 게 아니다


번호를 적어놓은 메추리알. 남편은 메추리가 태어나는 알의 번호로 로또 복권을 사겠다며 한껏 들떠있었다.


  가습기까지 설치해가며 메추리알을 굴려준지 일주일.

  앞서 메추리를 부화시켜본 사람들 말로는 이 시기 즈음되면 어두운 곳에서 불빛을 비춰 메추리가 태어날 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빛을 비추었을 때 붉은 점이 보이거나 그 주위로 뻗어 나온 혈관이 보이면 메추리가 태어날 수 있는 알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투명하기만 하면 메추리가 태어날 수 없는 알이었다.     

  유정란을 샀다고 해도 무정란이 일부 섞여 있을 수 있는 데다 환경이 제대로 조성되지 않아 메추리가 자라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검란은 지금까지의 환경이 적절했는지를 살펴보는 중간평가이자 몇 마리가 태어날지 대략적으로 예상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이었다. 메추리를 여러 차례 부화해본 고수들은 이러한 검란 과정을 거쳐 메추리가 태어나지 않을 알을 미리 솎아내기도 했다.     

  메추리를 처음 부화시켜보는 우리가 제대로 검란을 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일주일간 알을 굴리며 메추리의 탄생을 간절히 원했던 남편은 메추리가 과연 몇 마리나 태어날지 적잖이 궁금한 눈치여서 우리도 검란을 해보기로 했다.     

  무늬만으로는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메추리알을 구분하기 위해 꺼낸 알 껍질에 1부터 45번까지의 번호를 적어 넣었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 우리가 넣어둔 메추리알은 채 50개가 되지 않았는데 번호가 45번까지 채워지자 매주 로또복권을 사는 남편은 메추리가 태어난 알의 번호를 기억했다가 복권 번호로 찍겠다며 한껏 들떴다. 로또의 현실성에 대해 늘 회의적인 나는 메추리가 한 마리도 태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 없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그 사실을 내뱉지는 않았다.     

  조심스레 알을 가지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휴대폰 손전등 위에 하나씩 비춰보았다.

  1번 알은 속이 훤히 비치도록 한없이 투명했다. 아마추어인 우리가 보아도 메추리가 태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알이었다. 알을 한쪽으로 분류하고 2번 알을 올려놓았다. 이번에도 붉은 티끌 하나 없이 투명한 알. 고민할 것 없이 1번 알 옆에 2번 알을 두고 3번 알을 올렸다.  

     그렇게 열댓 개가 넘는 알을 검사했지만 붉은 점이나 혈관이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다음 알은 유정란일 거야, 희망을 걸던 남편의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기계적으로 메추리알을 올려놓고 이리저리 굴려 유정란의 흔적을 찾다가 아무 말 없이 알을 한데 모아두었다.

  아무래도 망한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거의 모든 알이 빈 집이었다. 이제 남은 알은 스무 개 남짓. 이 중에 메추리가 살고 있는 알이 있을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다시 메추리알을 하나씩 올렸다.

  이번에도 무정란.
  아아, 정녕 지난 일주일간의 노력은 모두 헛수고였던 걸까?

 

 

  그때 올려둔 메추리알 하나에서 붉은 점 하나가 또렷하게 보였다. 붉은 점 주위로 퍼져나가는 실오라기 같은 혈관도 분명히 보였다. 20번 대에서 처음 나온 유정란이었다. 메추리를 품은 알이 행여 식을까 부화기 속에 넣어두고 검란을 이어갔다.

  여전히 줄줄이 무정란이었지만 간간히 혈관이 보이는 알들이 있었다. 마지막 알까지 검란을 끝낸 결과 마흔다섯 개의 알 중 다섯 개 남짓한 알만이 확실한 유정란이었다.

  9분의 1 정도의 부화율. 하지만 이 알들이 모두 부화할 거라는 보장은 또 없었다. 이 중에서 일부는 끝까지 발생하지 못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썩어버릴 수도 있어서 그야말로 태어날 때까지 태어난 게 아니었다.

 

 

 

  모든 알을 다시 부화기에 넣어주었다. 말없이 부화기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 앞으로 율무가 다가와 자리를 잡고 누웠다. 메추리 부화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열흘 정도, 과연 밤낮으로 켜둔 전구의 전기요금과 서너 시간마다 알을 굴린 남편의 노력에 상응할 만한 결과가 나올 것인가. 이제 모든 것은 하늘의 뜻에 달려있었다.

  부화일이 다가오면서 남편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수시로 부화기 안을 들여다보며 금이 간 알은 없는지 확인하고 가습기를 설정해 높은 습도를 유지했다. 가끔 알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현상을 겪은 적도 있지만 메추리가 나온 알은 아직 없었다. 알들은 소리도 미동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희망이 점점 사라지고 있을 무렵, 나는 볼일이 있어 고향 부모님 댁에 잠시 내려가게 되었다. 만에 하나라도 메추리가 태어날지 모르니 내가 집을 비운 동안 남편이 메추리를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가끔 예정일이 지나서 태어나는 메추리가 있기도 해서 혹시 메추리가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알을 가차 없이 내다 버릴 수는 없었다. 내가 다시 집에 돌아올 때까지 메추리가 태어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 포기하자는 생각으로 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첫 번째 메추리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받은 것은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TV를 보며 웃고 떠들던 중에 남편으로부터 동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설마,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동영상에는 온 힘을 다해 알을 깨고 나오는 작고 작은 메추리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말 너무 진부하게도 나는'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라는 <데미안>의 구절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 말고는 어떤 말로도 지금 이 상황과 느낌을 표현해낼 수 없는 기분이었다.

  하나의 생명이 이 세상에 막 태어나는 광경. 삐약삐약, 가느다랗지만 또렷한 울음소리.

  그 장면만으로도 가슴 한 구석이 벅차올라서 나는 메추리가 무사히 알을 깨고 나오기를 먼 곳에서 간절히 바랐다.

  첫 번째 메추리가 알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는 소식을 받고서야
  이름은 메밀이가 좋겠어, 문득 떠올린 나는 삐죽삐죽 털이 제멋대로 뻗은 동영상 속 더벅머리 새에게

 

  안녕, 이 세상에 온 걸 환영해.

 

나직이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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