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 루퍼트 스파이라, 퍼블리온, 2023
평온함과 행복이란 우리 마음이 때때로 갖게 되는 대상적 경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 그 자체의 본성입니다. 행복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소란스러운 대상적 경험은 행복을 희미하거나 가려진 것처럼 보이게 할 뿐, 결코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삶의 궁극적인 목표인 지속적인 평온함과 행복은 늘 우리 안에 있으며, 누구든지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모든 위대한 종료와 영적인 전통들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p.31
여러분이 앉아 있는 방에 무엇이 있는지 누군가 물어본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런저런 사물이 있다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공간이 있다고 대답하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공간은 책상, 의자, 책, 컴퓨터 등의 사물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이 경험되지 않는다고는 주장할 수 없겠지요.
p. 75~76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이 글이 인쇄되어 있는 하얀 종이에 주목해 보세요. 그제야 당신은 갑자기 글자의 배경에 있던 하얀 종이의 존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책을 읽으며 글자 뒤에 이미 하얀 종이가 있다는 사실을 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에 집중하다 보니 하얀 종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알아차림은 마치 하얀 종이와도 같습니다.
p.97~98
주먹을 쥐려면 처음에는 애를 써야 하지요. 하지만 주먹을 쥔 상태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게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주먹을 쥔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손을 펴려고 한다면, 손을 펴기 위해서 또다시 애를 써야만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주먹을 쥐고 있는 상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손을 펴려면 애를 써야만 하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손을 편안하게 이완하여 편 상태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손을 펴기 위해 새롭게 애를 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중략) 개별적인 자아인 "에고"란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무한한 알아차림을 외관상 유한한 마음으로 축소해버린 상태이지요.
p.125~126
존 스미스라는 배우가 리어왕 역을 맡았다고 상상해 봅시다. 존 스미스는 무한한 알아차림을, 리어왕은 유한한 마음 또는 외관상 개별적인 자아를 상징한다고 가정합시다.
이때 존 스미스와 리어왕은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닙니다. (중략)
어느 날 존 스미스가 맡은 배역에 너무나 깊이 몰입한 나머지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스스로가 리어왕이라고 믿는다고 상상해 봅시다. 리어왕은 연극 속에서의 자신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존 스미스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실 자신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리어왕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리어왕은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략)
따라서 리어왕이 자신을 리어왕이라고 믿는 한,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리어왕은 자신의 괴로움을 덜기 위해 무언가 행동을 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괴로워한다는 것은 곧 대상적 경험 안에서 끊임없이 행복을 찾으려 애쓴다는 뜻이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리어왕의 선택지가 될 수 없습니다.
p.14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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