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서리라고 하면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이 떠오르기 마련. 옛날에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그런 서리를 하면 범죄가 된다. 그래서 시골에서 서리라고 하면 나는 겨울 무렵 시작되는 ‘frost:대기 중의 수증기가 지상의 물체 표면에 얼어붙는 것’이 먼저 떠오른다.
떠오를 것도 없이 서리는 내 삶의 일부로 들어와 있다. 아침에 문을 열면 마당 잔디에 낀 서리부터 난간이며 대문이며 하얗게 얼어붙은 것이 겨울 왕국을 떠올리게 한다. 출근을 하려면 자동차 유리 표면에 앉은 서리를 긁어내야 한다. 지하주차장이 있는 도시에서는 이런 불편함이 없었는데 나는 매일 아침마다 스크래퍼를 들고 차 앞유리와 싸움을 벌인다. 퇴근 후에 앞유리에 덮개라도 씌워두면 편하겠지만, 자꾸 잊어버리거나 생각나도 영 귀찮다. 그냥 아침에 서리를 구경하면서 긁어내는 것도 하루 일과처럼 여기기로 했다. 몇 가지 불편함만 감수하면 시골은 참 살기 좋은 곳이다.
서리가 끼면 눈이 온 것과는 다르게 미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눈이 오면 온세상이 하얀 느낌이 든다면 서리가 잔뜩 낀 시골의 아침 풍경은 흑백사진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아지고 명도가 높아진 느낌이랄까. 나는 계절마다 자연이 그려내는 그림 중에 초겨울의 이 풍경이 가장 신비롭다.
도시에서는 길가에 내놓은 쓰레기봉투나 자동차나 도로 표면에 앉은 서리, 건물 화단이라도 있어야 서리가 내린 자연의 그림을 구경할 수 있었다면, 시골에서는 문만 열면 그런 그림들이 펼쳐진다.
코끝을 찌릿하게 만드는 차가운 공기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가 그 숨을 토해내고 나면 하얗게 뿜어져 나오는 입김들, 이 입김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느낌마저 든다. 서리가 내린 시골의 아침이다. 서리가 내린 풍경은 주로 아침에만 볼 수 있다. 햇빛이 들고 잠시 후면 거짓말처럼 이 풍경은 사라진다. 수줍게 잠시동안 이 풍경을 보여주고는 아침 해가 뜨면 서둘러 사라지는 풍경들이다.
후추와 율무는 이 풍경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아침에 나가서 오줌을 싸라고 문을 열어주면 잽싸게 뛰어나가던 녀석들이 코 끝에 와닿는 차가운 공기가 싫은지 고개만 빼꼼이 내밀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간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서리 내린 잔디를 밟고 난 후에 털이 젖는 것이 싫은 모양이다. 어쩌면 이 풍경은 내가 사람이기 때문에 신비하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야생의 동물들에게는 코앞까지 닥쳐온 추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수 있다.
동물들에게는 이 풍경이 어떨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한 겨울의 강추위가 시작되어 느즈막히 일어나 눈 앞에 펼쳐지는 이 흑백사진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감상하는 일을 상상한다. 마당에 서서 제멋대로 엉클어진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과 하얗게 부서지는 입김, 아침을 알리는 산새들의 노래를 듣는 것, 그것이 겨울이란 혹독한 계절의 가장 상쾌하고 긍정적인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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