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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퉁의 기록/ReadingBooks

RB001 시시포스 신화 읽기 02

by 구루퉁 2021. 1. 12.

  까뮈, 그의 글을 읽을 수록 뭔 '개소리'인가 싶고, 그러다가도 무릎을 탁 치는 순간들이 오기도 하는 것이다.

  부조리의 벽들에서는 마지막 장의 내용만 참고하면 될 것도 같다. 부조리의 벽들에 앞선 내용들은 마지막 장의 말을 하기 위한 나열들과 논리를 세우기 위한 근거 정도이다. 성격이 급한 나로서는 미괄식은 읽기가 힘들다. 아무튼 정리를 조금 해보고자 한다. 

● 정리
  사람은 부조리해서, 타인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로 남는다. 그 사람의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을 인식한다. 감정은 감정이 초래하는 결과를 살피고 면면들을 포착하여 정의내릴 수 있다. 사람의 행위는 진솔한 충동과 연기(연극, 페르소나 정도로 이해함)가 있다. 감정도 그러하다. 

  일상에서 권태로 인해 의식운동이 시작된다. 의식하지 않으면 가치를 지닐 수 없다.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모두 알고있지만 모르는 척 살아가고 있다. 경험이 없기 때문인데 죽음에 대한 경험은 오로지 타인의 죽음이다. 인간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존재다. 이것을 알고있다고 상상하는 것과 우리가 실제로 알고있는 것에는 편차가 존재한다. 우리는 죽음에 동의하거나 무지한 척한다. 

  인간은 세계를 인간중심적으로 정의한다. 의식하는 순간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중심적인 세계가 된다. 그래서 의식하고 정의내리는 순간 세계은 부서진다. 같은 맥락으로 스스로가 자아를 포착하는 것은 모순된다. 우리의 지성과 세계 또한 부조리하다. 삶과 앎은 부조리한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비합리적인 것들이고, 세계는 비합리적인 것들도 가득하다.

  혼자서는 세계의 통일된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통찰력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부조리들, 그 벽에 대한 명확한 인식만을 하게 될 뿐이다. 

  여기까지가 부조리의 벽들 챕터에 대한 정리다. 카뮈는 사막에서 태동하는 사유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이 사막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제대로 감이 오질 않는다. 당장은 어떤 선험적 경험이 없는 세계쯤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 선험적이란 경험에 앞서서 인식의 주관적인 형식이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카뮈는 세계를 의식하는 순간 깨어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중심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인식론에 잇어서 우리는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 지금까지의 감상
  까뮈는 '희망'을 덧없는 것들, 허망한 것들 쯤으로 여긴다. 세계는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것들 투성이기에 삶의 의미는 스스로 찾으라고 말한다. 실존주의 이전의 철학에서는 희망을 이야기 하고 희망을 갖으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희망은 없으니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으라고 말한다. 뭐야, 결론을 안 지어주고 문제 제기뿐이잖아! 화가 나려고 하지만 끝까지 읽어보려고 한다. 다음 장에서는 또 카뮈가 무슨 말을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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