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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퉁의 기록/ReadingBooks

RB001 시시포스 신화 읽기 04

by 구루퉁 2021. 1. 25.

 이번 주말을 통해서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를 다 읽었다. 주말 찬스까지 요긴하게 사용해서 열흘 동안 완독을 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독서지도사 '문뜰'선생님의 진도계획표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포스팅은 계획대로 10번에 나눠서 올릴 계획이다. 읽기는 다 읽었는데 글자를 다 읽었다는 말이지 독해를 다 했다는 뜻은 아니니 포스팅을 하면서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볼 계획이다. 반복되는 카뮈의 포스팅으로 지루하신 분들은 조용히 뒤로가기를 누르셔도 괜찮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개인적인 기록에 불과하니까. 


부조리한 자유

 앞서 부조리한 문제들을 살폈고 철학이 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앞선 철학자들의 사상들을 살짝 옅보고 왔다. 이번 챕터에서는 이 부조리한 세계에서 자살을 해야하는 것인지, 혹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나온다. 

 우리가 동물이라면 세계의 일부에 속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성이 있기 때문에 세계와 분리, 대립된다고 한다. 여기서 이성은 사유를 하는 도구로써의 이성이다.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시각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우리가 매 순간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인간은 필멸자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고 하루하루 늙어갈 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되는 상태이다. 이 부조리함을 알면서 우리는 자살을 택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 어차피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죽음을 먼저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반항'이다. 반항엔 희망도 없지만 체념도 아니다. 

 우리는 부조리한 세계에 속하고 있다. 우리는 부조리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죽어가고 있으니까. 까뮈는 묻는다. '영원'이라는 보장이 없이 자유로운 존재가 있을까? 실존에 있어서 필멸자는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다고 꿈꾸고 마침내 내 삶의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내 삶의 의미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그 틀 안에 나를 가두고 옥죄는 셈이다.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유롭다고 느낀다. 역시 부조리하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갖지 말아야하는 것일까. 인간의 정신과 가치는 자신이 축적한 경험의 양과 다양성을 거쳤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일률적인 경험을 강요하고 있다.

세계는 부조리하다. 우리가 죽음에 반항하여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이 부조리함을 이어나가는 것이 된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회가 그려내고 있는 인간상, 예를 들면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을 얻고 적당한 때에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자녀들을 기르는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조차 자유롭지 못한 우리가 죽음이라는 거대한 철학적 문제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래 내용은 이번 챕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문제다. 바로 '종교'에 관한 내용. 철학과 종교는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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