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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의 기록/뜨리의 슬기로운 OTT 라이프

드라마 :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 (뜨리의 슬기로운 넷플생활)

by 구루퉁 2022. 4. 16.

마법소녀는 신을 꿈꾸는가
드라마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


반은 인간, 반은 마녀인 소녀가 16세 생일을 앞두고 어느 쪽의 삶을 택할지 고민에 빠진다.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한쪽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라니. 게다가 말이 좋아 선택이지 마녀의 삶을 강요하는 가족에 맞서 홀로 인간의 길을 꿋꿋이 고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대도 지금까지 인간계에서 착실히 쌓아온 관계들이며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인간 남자친구는 또 어쩌지?

하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은 십대 소녀 사브리나는 그 나이에 걸맞은 패기로 그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기로 한다. 인간계로 대변되는 ‘자유’도, 마녀회로 대변되는 ‘힘’도 사브리나는 모두 갖기를 원한다. 그렇게 인간계 고등학교와 마법학교를 오가는, 사브리나의 이중생활이 시작된다.

인간으로서의 삶도, 마녀로서의 삶도 훌륭히 꾸려가고자 했던 사브리나. 그러나 그의 지나친 열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각종 문제를 일으킨다. 인간 친구들의 고민을 마법의 힘으로 해결해주려는 사브리나의 무모한 행동은 현실세계에 큰 혼란을 가져오고 주위 사람들을 상처 입힌다.

반은 인간, 반은 마녀이기에 양쪽의 좋은 점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브리나는 반쪽의 정체성은 결국 자신이 그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의미임을 아프게 깨닫는다. 때로는 하나의 문이 닫혀야 또 다른 문이 열리는 법. 시즌1의 끝에서 사브리나는 마법소녀로 각성하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이하 <사브리나>)는 우리가 흔히 ‘마법소녀물’이라고 부르는 장르에서 기대하는 바를 충실히 재현한다. 강력한 힘을 가진 마녀가 세계를 구한다는 서사는 그동안 숱한 애니메이션과 영화, 드라마에서 선보인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브리나>를 시즌4까지 이어올 수 있게 한 힘은 아니다. 이 드라마의 특별함은 사브리나를 비롯한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직조해내는 여성 서사의 힘, 그리고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오컬트적 설정에 있다.

극중에서 마녀들은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마법의 힘과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명을 얻지만 실상은 ‘블랙우드 사제’와 ‘어둠의 신’으로 대변되는 남성 중심 가부장적 질서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야기의 큰 축을 이루는 두 여성, 사브리나의 큰 고모인 ‘젤다’와 아담의 첫 번째 아내이자 최초의 악마 ‘릴리트’ 역시 강력한 힘을 지녔음에도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고 남성 권력자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며 자기 자리를 찾고자 하는 인물이다.

극 초반에서 체제를 지탱하는 이러한 여성 캐릭터들이 어느 순간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해 나가며 통쾌한 반격을 날리는 과정은 <사브리나>가 지금 이 순간 다시 쓰여져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1930년대 발간된 <사브리나>의 원작격인 만화책이나 이를 바탕으로 제작된 1990년대에 제작된 <미녀 마법사 사브리나>와 달리 넷플릭스 시리즈의 <사브리나>는 힘을 가진 여성이 ‘마녀’라는 정체성에 갇히지 않고 원하는 바대로 나아가는 모습을 담았다.

과거 대규모의 마녀사냥이 벌어진 도시, ‘그린데일’의 마녀들이 어둠의 남신이 아닌 처녀이자 어머니이며 노파인 헤카테 여신을 섬기게 되고, 릴리트가 어둠의 남신을 자기 손으로 처단하는 전개는 짜릿함과 통렬함을 선사한다. 그렇게 <사브리나>는 마법소녀물이라는 장르를 넘어 여성의 각성과 여성들의 연대가 가져올 새로운 미래를 그려낸다.

사브리나가 각종 마법을 선보이며 사용하는 소품이나 사브리나의 사촌이자 만능 해결사인 ‘엠브로즈’의 다양한 마법도구를 보는 것도 <사브리나>의 쏠쏠한 재미다. 오컬트와 앤틱이 어우러진 브리티시(British)풍의 미장센은 영상미와 더불어 시리즈 전체를 끌고 가는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다.

성경에 기반을 둔 설정들을 차용하는 동시에 기독교적 질서를 비트는 신성모독 스타일의 블랙 코미디도 빼놓을 수 없다. ‘하나님, 맙소사!’(Oh, my GOD) 대신 ‘사탄이시여!’(Hail Satan!)라고 부르짖고, ‘what the hell!’(젠장, 이게 뭐야!) 대신 ‘What the heaven!’을 외치는 디테일한 대사부터 시즌 내내 이어지는 ‘불경한’ 에피소드를 보다 보면 어느새 시즌4 마지막 회에 도달해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즌을 거듭하며 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니게 되는 사브리나. 신이 된 마법소녀는 이야기의 끝에서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세상은 여성에게 힘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우리, ‘강력하고 길들여지지 않는 여성’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세상에 균열을 내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논란을 일으키는 지금, ‘당당한 페미니스트’임을 공표하는 사브리나의 존재가 한없이 고맙고 또 눈부시다.


*이 글의 제목은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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