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들을 위한 판타지
드라마 <이지파생활>
모든 것이 예전과는 다른 나이, 30대.
확연히 줄어든 아침잠이나 소화력만큼이나 떨어진 피부 탄력, 수시로 삐걱거리는 관절. 슬프게도 이 모든 게 사실이지만, 전과 다른 것이 비단 건강만은 아니다.
앞자리가 3으로 바뀌기 무섭게 나를 둘러싼 세상과 사람들의 기대도 변한다. 좋은 대학의 졸업장,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최선을 다해 이 두 가지를 성취하니 이제 돌아오는 것은 결혼은 언제 하고, 애는 언제 낳을 거냐는 주변의 간섭들 뿐. 도대체 언제가 되어야 온전히 나의 행복만을 생각하고 살 수 있는 것일까?
상하이의 성공한 커리어우먼, ‘선뤄신(배우 친란)’의 삶도 대한민국의 흔한 30대 여성들과 다르지 않다.
천문학과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반대로 취업이 잘 되는 법학과에 간 뤄신은 이후 대기업의 법무팀에 입사, 차장 자리까지 올랐다.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이지만, 서른이 넘어 결혼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뤄신은 여전히 엄마 성에 차지 않는 딸이다.
그렇다고 직장생활은 어디 만만한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되지도 않는 공격을 받고, 업무성과를 내기보다 사내 정치를 잘해야 하는 분위기 속에서 뤄신은 법무팀에서 행정팀으로 좌천되는 굴욕까지 당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게 있다면, 법무팀에 있을 당시 자신의 보조로 뽑은 신입사원 ‘치샤오(배우 왕학체)’가 자신을 끝까지 따르겠다며 행정팀으로 따라와 준 것 정도일까.
배경을 그대로 서울로 옮겨와도 무색하지 않을 만큼 세련된 영상미와 속도감 넘치는 전개가 돋보이는 드라마 <이지파생활>(이하 <이지파>)은 직장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선뤄신과 주얼리 디자이너의 꿈을 안고 돈을 벌기 위해 입사한 치샤오의 로맨스를 그려낸 오피스 드라마다.
동시에 <이지파>는 두 사람의 나이차가 열두 살이라는 점에서,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로맨스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는 점에서 ‘누나들의 욕망’을 착실하게 반영한 판타지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20대 초반이지만 착실하고 속 깊으며 믿음직한 치샤오는 현실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유니콘 같은 존재다.
그는 상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애정임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감수성 높은 인물이자, 자신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앞세우기보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성숙한 인물이다. 뤄신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회사에서 청혼을 해 뤄신을 곤란하게 만든 전 남자 친구와 달리 치샤오는 뤄신의 성향과 취향을 꼼꼼하게 파악해 그의 마음을 천천히 물들여간다.
그저 뤄신의 행복만을 바라는 연하남의 지고지순한 ‘직진’은 누나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치샤오의 노력은 워커홀릭인 뤄신의 건강을 살뜰히 챙기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주와 별을 좋아하는 뤄신을 위해 직접 디자인한 목걸이를 선물하는가 하면(디자인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뤄신을 재우려고 봉사활동까지 해가며 플라네타리움 상영관을 하룻밤 동안 빌리는 그의 진심은 맑다 못해 투명하다.
‘남자 친구든, 보조든 당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당신의 곁을 지키고 싶다’는 그. 말이 아닌 행동으로 뤄신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서서히 증명해나가는 치샤오의 노력은 열두 살의 나이차를 넘어 뤄신에게 닿을 수 있을까? 그 여정의 끝에서 ‘남이 보여주는 화려한 풍경을 까치발을 들고 보기보다 소박한 풍경이라도 자신의 두 다리로 온전히 서서 즐기기를 원하는’ 강하고 독립적인 뤄신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유치한 전개나 부자연스러운 연출 없이 깔끔한 전개가 돋보이는 <이지파>는 중국 현대물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취업이며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결혼과 출산 문제로 고민하는 상하이 청춘들의 얼굴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청춘들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아 더욱 마음이 쓰이기도 한다.
가진 것은 젊음뿐이었던 20대를 지나 이제 그 젊음마저도 유효기간이 끝나가는 30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보다 30대가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 시간을 지나며 더욱 단단해진 스스로를 알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불안하고 흔들리고 고민하는 우리에게 일도 사랑도 우정도 ‘똑 부러지게 해내는 삶’(<이지파생활>을 번역하면 ‘이성적/합리적인 삶’이라는 의미다.)은 언제쯤 찾아올는지 요원하기만 하지만, 그런 날이 영영 오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성장이라면 성장일 터.
다가오는 휴일만큼은 삶의 무게를 잠깐 내려놓고,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 가득한 드라마 속 세상에 몸을 맡겨보자.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우리, 누나들에겐, 비현실적일지언정 달콤한 판타지가 절실하니까.
도시의 야경을 동경하던 소녀에서 도시의 야경을 책임지는 성인이 되기까지,
그런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꿈과 환상이 <이지파>에 있다.
(+) 왕학체의 팬이라면 그의 다양한 오피스룩과 캐주얼한 패션을 볼 수 있어 더욱 추천. <유성화원>의 ‘따오밍스’ 같은 화려함은 아니지만(그렇다고 <유성화원>을 보라고 추천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뜨슬넷 유성화원편 참고) 단정하고 정제된 풋풋함을 느낄 수 있다. 극을 끌고 가는 친란의 안정적인 연기 덕에 그의 연기도 한층 편안하게 다가온다. 왕학체 필모를 깨려고 보았다가 친란의 매력에 빠져드는 마성의 드라마.
(+) 태풍이 몰아치는 밤, 사무실에 둘만 있는 상황에서 정전으로 열리지 않는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치샤오가 마음을 고백하는 씬(27화)은 내가 꼽는 명장면. (정말 배운 변태들이라는 생각 밖엔...) 말보다 몸이 먼저(?)인 서양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이런 연출이 넘나 좋았다.
(+) <이지파생활>은 본편 35화와 번외편 3화로 구성되어 있다. 넷플릭스에서는 본편만 볼 수 있고, 번외편은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 중국어(보통화) 자막은 있지만 한글 자막이 없는 게 문제인데, 번외편의 제목은 <구혼대작전>으로, 치샤오가 뤄신에게 프로포즈를 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https://www.olevod.com/index.php/vod/play/id/25879/sid/1/nid/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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