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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02 현실과 이상 사이

by 구루퉁 2023. 1. 7.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02화
- 현실과 이상 사이

  도로가 막히지 않는 시간을 틈타 길을 떠났다. 밤새 걱정을 사서 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나는 고속도로로 접어들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감았다 뜨니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들렸다. 서울에서 3시간 30분.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였다.   

  사람이 사나, 싶을 만큼 한적한 마을에 초입에 차를 세웠다. 골목이 좁아서 이쯤에 주차를 하고 집 앞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큰길 옆으로 난 작은 샛길을 따라 들어갔더니 길을 따라 집 몇 채가 줄지어 나타났다. 여전히 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집집이 내건 문패를 보며 사람이 사는 곳이로구나, 알 수 있었다.    

  길 끝에 다다랐을 때 이 집인 것 같다며 남편이 손짓을 했다. 나지막한 담과 짙은 초록색 대문이 있는, 마을 가장 안쪽에 있는 집. 우편번호가 적힌 주소 표지판이 대문에 단정하게 달려 있었다. 다 쓰러져 가는 시골집이면 어쩌나 했는데 정갈한 겉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겨울이라 풍경이 다소 휑했는데도 왠지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부동산에 연락을 하고 기다리는 사이 담 너머로 집을 훑어보았다. 단층짜리 주택이었지만 지붕을 따로 올려 옥상 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해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집 앞으로 널찍한 마당이 있고 집 옆쪽으로 작은 텃밭이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서울에서 집을 지키고 있는 우리 강아지 후추와 율무도 이곳이라면 마음껏 뛰놀 수 있을 테고, 멀리 가지 않고서도 간단한 농사 정도는 지을 수 있어 시골살이를 가볍게 경험해보기에는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어떠냐고 묻는 남편에게 꽤 괜찮아 보여, 하고 말했더니 남편은 자기가 몇 달간 고르고 고른 곳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처음 본 우리 집. 마당이 넓고 집 옆으로 텃밭까지 있는데다 옥상에 지붕을 올려 공간을 낸 점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다.

 

  부동산 아저씨를 만나 집 내부를 꼼꼼히 돌아보고도 나는 이 집을 계약하지 않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이제 이 집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 집이 너무 괜찮아서, 나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시골에서 살아보자는 결심을 했다고는 해도 이렇게 금방 마음에 드는 집을 찾아서 이사를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올라가는 내내 마음 한 구석에서 정 괜찮겠느냐는 물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시골이라고 하니 막연히 텃세가 걱정되기 시작했고 난방이나 벌레 같은 사소한 문제들도 신경이 쓰였다. 시골에서 살자고 먼저 호기롭게 이야기한 것은 나였는데, 일이 너무 쉽게 풀리니 뭔가 잘못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서울로 올라가는 도로는 퇴근시간이 겹치며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차 안에 꼼짝없이 갇혀 반짝이는 서울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불빛들, 저 속에 내 자리가 반드시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날들이 있었다. 유통기한이 새겨진 통조림 같은 방에서 내 자리가 있음에 안도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나의 쓸모를 되묻는 서울에서 나는 언제나 이방인이었고 때때로 부적격자였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냈고 살기 위해 노력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이에게 내 필요를 증명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렇게 나는 다른 누군가가 되기 위해 내가 아닌 채로 대부분의 서울을 살았다. 깨어있는 내내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서 기진맥진해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쓸모 있어야 하는 도시에서 나는 쓸모 있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쓸모없다 느껴지면 살아갈 이유를 모르겠다며 자주 울었다.  

  살아갈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길가에 핀 민들레가 그러하듯, 처마 밑의 거미가 그러하듯, 그저 살아있어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또 그러기 나는 너무나도 겁 많고 소심한 인간이었다. 남편과 긴 대화를 하면서 나는 마침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나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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