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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05 마지막을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by 구루퉁 2023. 1. 11.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05화
- 마지막을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나는 내내 여기가 아닌 곳들을 기웃거렸다.

  옮겨가기로 결심하니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중 한 가지는 우리 집을 채우고 있는 이 많은 물건들을 결코 시골집에 다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사 날짜를 정하고 갑작스러운 이사 소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계약 후 한 차례 더 내려가 집을 실측하고 나니 비로소 가져갈 물건을 추려야 하는 현실이 보였다.     

  마당이나 옥상 공간까지 생각하면 지금 사는 집에 비해 공간이 넓었지만, 실내 공간만 따져보면 지금 사는 집에서 방 한 칸이 없어지는 셈이었다. 이사 업체 몇 군데서 견적을 내보니 트럭 한 대에 짐이 간신히 다 들어가거나 경우에 따라 한두 가지 가구를 지 못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났다.     

  문제는 또 있었다. 예전에 지어진 시골집은 공간들이 사각 형태로 정확히 떨어지지 않았고 군데군데 바닥 수평이 맞지 않아 가구를 어떻게 배치할 지부터 난관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우리는 서울 집의 물건들을 그 집에 옮겨놓아야 했다. 나와 남편은 각자 할 수 있는 일에 착수했다. 남편이 종이에 그려온 실측도를 보고 집안 가구들의 크기를 재어 포토샵으로 가구를 이리저리 배치하는 동안 나는 구석구석 눈에 보이지 않게 숨겨둔 물건들을 모조리 꺼냈다.     

  내 나름 홀가분하게 산다고 살았는데 그간 참 많은 물건들을 이고 지고 살았구나 싶었다. 꼭 필요한 물건, 아끼는 물건만 남기는 것을 목표로 몇 차례 물건들을 처분했다. 이사라는 계기로 쓰지 않는 물건들을 덜어내니 기분이 가뿐해졌다. 며칠에 걸쳐 물건을 버리고 나눠주고 중고로 팔면서 시골에 사는 동안은 지금 가진 물건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짐을 더 늘리지 말고 가볍게 살자고 마음먹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남편이 가구 배치를 끝낸 무렵부터 우리는 시골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시골집을 정리하고 짐 일부를 가져다 놓겠다는 명분으로 번번이 집을 나섰지만, 사실은 서울의 분주한 공기를 하루빨리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후추와 율무에게 시골집을 보여주러, 잔뜩 엉킨 생각 뭉치를 풀어내러, 그냥 바람 쐬러 … 갖은 이유로 우리는 시골집을 오갔다.     

  한창 낮밤이 바뀌어 해가 지면 하루가 시작되고 해가 뜨면 하루가 끝나던 시기였다. 우리는 지난 계절의 옷이나 책, 식기 등의 잔짐을 승용차에 가득 싣고 한적한 밤의 고속도로를 달렸다. 어떻게든 트럭 한 대에 물건을 다 싣기 위한 눈물겨운 시도였다. 도시의 불빛이 저 멀리서 반짝이는 것을 보며 우리는 시골에서 펼쳐질 낯선 삶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돌이켜보면 우스운 짓도 많이 했다. 시골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없애고자 한밤 중에 마당이며 집 안에 팥을 뿌린 일도 있었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름보일러에 호기롭게 기름을 가득 채웠다가 36만 원(!)을 내게 되어 컵라면을 먹은 일도 있었으며, 보일러가 제대로 돌아가는지 확인해본다며 작동시켜놓은 채 서울로 올라가는 바람에 일주일 뒤 내려왔을 때 집이 불가마가 된 일도 있었다. 쩔쩔 끓는 바닥을 밟은 나와 남편은 반절 남은 기름통을 확인하고 그래도 집이 너무 뜨거워 벌레들이 밖으로  나갔을 거라며 애써 서로를 위로했다. 18만 원 치의 방역이었다.     

  그렇게 이사 준비로 다사다난했다. 수시로 일탈과 여행이 필요했던 그 무렵 나에게는 저녁 늦게 출발해 새벽 동안 집을 치우고 쪽잠을 잔 뒤 다음 날 오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이 코스가 삶을 붙드는 힘이었다. 시골집에 들러 별별 일을 다 벌이는 한편, 벽을 흰 페인트로 칠하고 바닥을 쓸고 닦다 보니 어느새 이곳이 별장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몇 달간 비워둔 집이라 꽤 추웠는데도 우리는 전기장판까지 챙겨가 텅 빈 시골집 한편에서 새우잠을 자는 요상한 일을 반복했다. 강아지들까지 몰고 갔던 어느 날에는 남편이 전에 살던 사람이 두고 간 짐을 치우고 잠든 사이에 마당이 보이는 창문 앞에 간이 책상을 바짝 붙여 놓고 일을 했다.     

  대문을 열어두었더니 개들이 마당과 집을 오가며 뛰놀았다. 호기심 많은 율무는 텃밭 구석구석, 잔디밭 여기저기를 뒹굴며 한껏 ‘강아지스러운’ 행동을 했다. 일을 하다 고개를 들면 풀과 나무와 기차와 개들이 보였다. 후추는 새소리를 듣다가 땅을 파다가 풀숲을 킁킁거리다가 하늘을 보다가 틈나는 대로 내 발치에 머물렀다. 털을 쓰다듬어주면 다시 마당으로 달려갔다.     

대문을 열어두었더니 개들이 마당과 집을 오가며 뛰놀았다. 서울에서는 그저 조용한 강아지였는데, 마음껏 흙을 밟고 여러 냄새를 맡으며 신이 난 모습에 잘 한 일이구나 생각했다.

  서울에서는 그저 얌전하고 조용한 강아지였는데, 마음껏 흙을 밟고 여러 가지 냄새를 맡으며 신이 난 모습에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잘한 일이구나,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몇 주 동안 버릴 물건들을 추리고, 깨지기 쉬운 물건을 따로 담으며 천천히 옮겨갈 준비를 했다. 결심이나 다짐 같은 마음의 준비도 차근차근. 한 회사에서 10년씩 일하는 나를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곳에서 10년씩 사는 나를 나는 아직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꾸고, 저곳에서 이곳의 삶을 그리는 사람.

  지긋지긋함이 아닌 애틋함을 남기기 위해 가장 안온한 순간에 짐을 싸는,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마지막을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나는 내내 여기가 아닌 곳들을 기웃거렸다. 어쩌면 나는, 서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시골에 내려가서 서울을 그리워하게 된다면 이곳에서의 삶도 그리 나쁘 않았다는 거겠지, 그렇게 서울에서의 하루가 또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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