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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살이의 기록/어쩌다 시골살이

03 일단 가는 거야

by 구루퉁 2023. 1. 9.

뜰의 기록 : 어쩌다 시골살이 03화
- 일단 가는거야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몇 날 며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밤낮으로 시골살이에 대한 글들을 찾아 읽었고 시골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상상하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했다. 소시지처럼 줄줄이 엮인 생각을 툭, 잘라낸 건 남편의 한 마디였다.   

 

 “일단 가보자. 가서 문제가 생기면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단호한 한 마디. 남편의 이 한 마디에 그 날이 겹쳐 떠올랐다. 우리가 아직 연인이었던 어느 날, 남편은 내게 결혼하자고 말한 그 날. 남편은 ‘저녁으로 치킨을 먹자’라고 할 때처럼 덤덤한 목소리로 결혼하자고 말했다. 너무도 태연해서, 나는 내가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꽃 모양의 자그마한, 풀 반지 같은 증표를 받고서야 내가 제대로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다만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음에도 확신을 갖기는 어려웠다. 대학 졸업조차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내 상황 때문이기도 했고, 아직 나 스스로 밥벌이를 해본 일이 없는 까닭이기도 했고, 좋은 기분과 나쁜 기분을 반복하다 한없이 우울해지는 나를 잘 알기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니까 나는 아직, 그렇게 말하려다

  당신이 모를 리가 없다, 고 지난 4년 동안 이렇고 저렇고 그런 나를 모를 리가 없다, 고. 그러니까 알면서, 그런 나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내게 내민 그 손을 나는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겁 많은 나는 꽤 오랫동안 우리가 연인으로 예쁘게 만나는 것과 결혼을 해서 부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불화들을 미리 떠올리며 걱정하던 것까지 지금과 똑같았다. 하지만 1년 뒤에도,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우리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고 결혼한 후에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시골에 사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벌레를 무서워하고 추운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나를, 이 사람이 모를 리는 없을 터였다. 일단 가서 살아보고 아니면 돌아와도 되지 않을까? 어느새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정말인지 근거 없는 자신감만 넘쳐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쉬면서도 다시 한번 이 남자의 그 근거 없는 자신감에 말려든 것이다.    

 

어쩌면 나는 시골에서도 서울에서와 같은 마음으로 살려 했던 건 아닐까? 홀연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감각을 느끼며 나는 떠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고 보면 (본인은 근거가 있다고 말하지만 내 눈에는) 근거가 없어 보이는 자신감, 사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남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평소에는 잠자코 내 의견을 따라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결단력과 추진력을 발휘하는 것 또한 내게 없는 점이었다. 배우자가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나에게 없는 타인의 장점을 내 인생에 끌어들여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내가 알고 있는 세계만이 전부인양 줄곧 내가 살아온 그곳에서 내가 믿어왔던 대로만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사람 덕에 나도 참 많이 변했다 싶어 웃음이 났다.    

  남편은 줄곧 이런 사람이었다. 늘 나를 인생의 중심에 두는 사람. 내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사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래, 일단 가보자. 가보고 아니면 돌아오자. 이 사람과 함께라면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중간에 돌아오게 되더라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며 웃을 수 있다.    

 

  비로소 나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이 실패에 대한 막연한 내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 남부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음…….    

 

  그런 마음에 지쳐 시골로 떠나려고 했는데 나는 시골에서도 서울에서와 똑같은 마음으로 살려하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서울에서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같은 마음으로 산다면 어서 살든 똑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다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그렇게 생각하자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별안간 우뚝 멈춰 섰다. 홀연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다시 날아갈 때가 되었다는 결심이 섰다. 이제까지 바람에 맞서 버텨왔지만 이제는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내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흘러가는 대로.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냥 그렇게. 그 집으로 하자는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편은 부동산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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