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었다. 아내가 집 앞에 백봉 오골계가 있다고 했다. 백봉 오골계? 첫 시골집에서 백봉 오골계를 키운 적이 있다. 우리는 청계 병아리를 분양받아서 키웠는데 뒷산에서 백봉 오골계가 나타났었다. 집을 나온 닭인 것 같았는데 산속을 헤매다가 우리 집 청계 닭들을 보고는 무리에 끼고 싶었는지 혹은 배가 고팠는지 닭장 주변을 맴돌았다. 그래서 닭장 문을 열어주고 조금 몰이를 했더니 닭장으로 쏙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후로 행복하게 청계 닭들과 잘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사료를 풍부하게 먹고 자란 덩치 큰 청계들이 백봉 오골계를 괴롭혔다.
아무튼 이제는 닭을 키우지도 않는데 웬 백봉 오골계? 우리 집 마당은 마른 계곡과 이어져 있다. 장마철에만 물이 내려가는 계곡인데, 평소에는 물이 없고 수풀이 우거져 있는 곳이었다. 얼마 전부터 그곳에 백봉 오골계 한 마리가 나타나 살고 있다는 것이다.
퇴근 후 집 앞 난간에서 백봉 오골계를 구경했다. 홀로 뽈뽈거리며 계곡 아래를 돌아다니는 하얀 닭 한 마리가 보였다. 이 녀석도 인근 닭장에서 탈출한 녀석일 테지.주인이 찾으러 오거나 길냥이들, 또는 삵이나 너구리한테 잡아 먹힐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돌아다니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우리는 ‘백봉’이라는 이름 붙여주며 백봉이의 생존을 응원했다. ‘서바이브, 백봉.’ 부제는 ‘마당을 나온 백봉의 생존기’라는 다큐를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옥수수를 던저주면 백봉이는 숨어있다가 나와서 옥수수를 먹고는 했다. 또 근처에서 길고양이가 지나가면 백봉이는 덤불 속으로 들어가 웅크린 채 고양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우리도 같이 숨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정이 든 모양이다.
겨울이 다가오자 우리는 백봉이를 위해 구조를 해야 할지, 혹은 구조를 가장한 감금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첫 번째로 백봉이를 잡는다면 키울 닭장을 만들어야 했다. 두 번째로 백봉이는 수컷이라 사료를 사다 먹여도 정말 관상용 그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세 번째로, 사실은 가장 큰 이유인데, 백봉이가 자유를 위해 탈출을 했는데 굳이 그걸 다시 잡아 가둘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잠시를 살다 가더라도 백봉이가 원하는 삶, 그러니 탈출하여 홀로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살게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닭 또한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홀로 지내는 백봉이는 분명 겨울나기 힘들 것이었다. 나는 백봉이가 잡혀주면 어떻게든 키워주마, 하는 마음으로 후추율무가 쓰는 켄넬에 옥수수를 넣고 문에 끈을 달아 계곡에 덫을 설치했다. 백봉이는 영리했고, 끝내 잡히지 않았다. 겨울이 찾아왔고 우리는 백봉이가 있음 직한 곳에 옥수수나 양배추를 손질하고 남은 것들을 던져 주고는 그의 생존을 응원했다.
최근 며칠간의 폭설과 한파에도 종종 모습을 보이던 백봉이가, 볕에 나와 죽어있었다. 새하얀 눈 위로 내려앉은 햇살처럼 반짝이던 백봉이. 비둘기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풀 사이에서 나타나곤 했고, 가끔 아침이면 생존신고를 하듯 힘차게 울어댔던 백봉이는 이제 계곡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에 가만히, 하얀 털들이 세찬 바람에 흔들리지만 움직이지 않는, 차게 식어버린 생명이 우리 집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렇게 백봉이의 생존은 끝이 났다. 서바이브, 백봉의 엔딩크레딧이었다. 나는 백봉이를 치우지 않으면 봄엔 지네가 꼬일 거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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