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마주치는 것들이 참 많은데 그중에서 텃밭을 빼놓을 수가 없다. 도시 생활에서 텃밭이란 잘 정돈된 밭의 한 구역을 임대받아 주말마다 들려서 관리하고 수확하는 주말농장이 대부분이고, 옥상 한켠에 스티로폼 박스나 화분에 상추를 심거나 베란다에 들여놓고 작물을 키우는 베란다 텃밭을 상상하기 마련이다.
나는 도시에서 옥상 텃밭을 이용했었다. 근처 산에서 흙을 퍼오고 다이소에서 배양토, 상토 등을 사다 날라 만든 스티로폼 텃밭이었다. 인터넷으로 냉동식품을 주문하면 스티로폼 박스에 배달이 오곤 했는데, 이 스티로폼 박스가 참 처치 곤란이었다. 아파트라면 분리수거장에 그냥 내놓은면 끝이겠지만 빌라에 살던 나에겐 일일이 부숴서 비닐에 담고 날리는 스티로폼 가루들을 치우는 것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박스들을 모아 옥상에 텃밭을 만들었었다.
시골에 내려오니 텃밭이 참 넓다. 몇 평 안 되는 텃밭인데도 참 넓어 보인다. 그런데 막상 작물을 심어보면 넓어 보이던 텃밭이 너무 좁다. 상추며 토마토며 몇 줄 안 심었는데 벌써 꽉 차서 더 이상 심을 데가 없다. 루꼴라도 심어야 하고 오이도 심고 싶은데 어디에 심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뒤뜰이나 수돗가 주변 안쓰는 땅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 시골의 성실한 농사꾼들은 손바닥만 한 작은 땅도 그냥 놀리지 않는다. 뭐라도 다 심어놓고 기른다. 공용부지라든가 도로 옆의 작은 땅들에도 빼곡히 무언가를 심어둔다. 괜찮아 보이는 땅은 이미 이웃들이 다 심어놨다. 그걸 발견한 뒤로는 산책하면서 ‘여기에도 심어놨네, 저기에도 심어놨네, 와 대단한다.’를 연발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작은 텃밭들이 눈에 들어온다. 논둑에는 콩들이 심겨 있고, 경사가 심한 곳에는 호박이 심겨 있다. 재미있다. 땅이 있는데 그냥 놀게 할 수는 없지! 먹을 게 없던 과거, 땅이 없는 가난했던 사람들에게도 저마다의 살아가는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처음 일 년간은 이웃들이 심는 작물을 구경했다. 지역마다 잘 자라는 것들이 있고 심어야 하는 때가 다르다. 같은 오이를 심어도 경기도 중부권과 전라도 남부권에서 심는 시기가 다르다. 기온 차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들이 심는 작물들을 관찰했다.
텃밭에 작물을 심을 때는 미리 구획을 나눠두고 무엇을 심을지 정해놔야 한다. 작물들의 키와 습성을 고려해서 위치도 정해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넓은 텃밭이래도 작물을 얼마 못 심는다. 텃밭 계획엔 수확 시기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나는 올 겨울이 될 무렵 텃밭에 양파를 심어두었는데 이 양파는 4~5월이 되어서야 수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전까지는 텃밭에 다른 걸 심을 수가 없다. 3월이면 시금치, 상추, 루꼴라 등 심어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올해는 양파 때문에 상추를 뒤뜰에 심을 예정이다.
잘 모르겠을 때는 시골의 만랩 할머니들을 따라하면 된다. 시골의 첫집에서 나는 옆집 할머니께 딸기를 사다드리고 텃밭 조언을 구했다. 할머니는 땅만 조사 놓으라고 하셨고 일주일 뒤 할아버지와 오셔서 시금치 씨앗을 뿌려주셨다. 그리고 그 위로 흙을 1cm도 안되게 살살 덮으라고 알려주셨다. 알아보니 시금치는 광발아를 한다. 그러니 흙을 너무 두껍게 덮으면 싹이 자라질 않는다. 씨앗은 기본적으로 광발아와 암발아가 있다. 밝은 곳에서 싹을 틔우는 광발아 종자는 햇빛이 있어야 발아를 한다. 암발아 종자들은 어둡게 흙을 완전히 덮어줘야 씨앗이 움튼다.
시골의 만랩 할머니들은 이런 걸 다 안다. 그리고 몇십 년 동안 텃밭을 운영해오신 터라 따로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한 해 사이클을 다 돌린다. 만랩 할머니들은 그 나이까지 오래 살으신 이유가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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