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 이야기,
드라마 <멜로가 체질>
거칠게 요약하자면 세상은 내가 아는 사람과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여섯 다리만 거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가설까지 있을 정도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닐 테다. 어쨌든 우리와 멀고도 가까운 그런 아는 사람 이야기, 드라마 <멜로가 체질>은 나와 내 친구 혹은 친구의 친구 이야기인 것 같은 그런 아는 사람들 이야기다.
드라마는 세 사람 각각이 처한 현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동시에 대학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인 셋이 한 집에 모여 살며 나누는 대화를 밀도 있게 담아낸다. 텔레비전 바깥의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 이들 역시 내 뜻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인생과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는 일, 마냥 마음만 앞세울 수 없는 인간관계를 이고지고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하나의 테마나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서사가 아니라 이 시대 청춘의 일상을 담담히 보여주는 <멜로가 체질>. 여기에는 흔히 우리가 드라마라고 하면 떠올리는 극적인 치정이나 숨 막히는 긴장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반전 같은 것들이 없다. 그저 서른이 된 세 친구의 좌절 그리고 방황, 때때로 가뭄에 단비처럼 찾아오는 웃음과 위로가 있을 뿐이다. 손쉬운 연민이나 값싼 동정 없이 드라마는 세 친구를 둘러싼 현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한다.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진주와 싱글맘이자 회사원인 한주,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인 은정의 이야기에서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드라마를 특별하게 만드는가? 관성적으로 흘러가는 삶,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얼마나 많은 번뇌와 무수한 고민들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점이 이 드라마의 특별함이다. 늘 ‘쿨’하고 싶지만 지질하기만 한 우리 대다수의 자화상이 그곳에 있다.
기존 드라마의 클리셰를 비트는 것도 이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다. 모름지기 남자 주인공이라면 넘어지는 여자 주인공을 가뿐하게 받아들고 일으켜주는 것이 로맨스 드라마의 ‘국룰’이지만 <멜로가 체질> 속 범수는 첫 만남에서 넘어지는 진주를 가볍게 피하고 자신이 다칠 뻔 했다며 면박을 주는 인물이다. 시작부터 클리셰와는 거리가 먼 두 사람의 관계는 극중 진주가 집필한 드라마 ‘서른 되면 괜찮아져요’를 드라마PD인 범수가 촬영하기로 하면서 발전해나간다. 전혀 이어질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서서히 가까워져 가는, 결과는 뻔할지언정 과정은 결코 그렇지 않은 전개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촌철살인의 ‘말맛’ 역시 이 드라마의 참맛이다.
“꽃길만 걷겠다”며 부푼 꿈을 안고 유명 작가의 작업실에 보조작가로 들어간 진주가 밤샘 작업에 지쳐 내뱉는 대사 “그래, 꽃길은 사실 비포장 도로야.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데 죽을 수도 있다.......”부터 자신의 후배이자 진주의 구남친인 환동이 범수와의 의리를 위해 좋은 기회를 마다할 때 범수가 환동에게 해주는 대사 “제발, 사회생활 이렇게 꾸밈없이 하지 좀 말자. 그럼 그냥 꾸밈없는 호구되는 거야.”까지 그야말로 ‘뼈 때리는’ 찰진 대사들이 다음 화로의 진행을 멈출 수 없게 한다.
그리하여 <멜로가 체질>을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평양냉면’.
극 중에서 평양냉면 마니아인 범수는 한 번도 평양냉면을 먹어보지 않은 진주를 맛집으로 데려간다. 단출한 구성의 냉면을 한입 먹어보고 “뭔가 잘 못 된 것 같다”며 식초를 넣으려는 진주를 막아서는 범수. 그가 가게를 나와 진주에게 남기는 말이 이 드라마에 대한 가장 탁월한 설명이다.
“이 음식이 그래요. ‘뭐지, 이거?’ 하다가 다음 날 갑자기 생각이 나. 그때부터는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거든.”
이 대사의 '음식' 자리에 '드라마'를 넣어 읽으면 과연 틀림이 없다. 처음 볼 때에는 ‘뭐지, 이 드라마?’ 싶지만 다음 날 갑자기 드라마 속 대사가 머릿속에 맴돌고, 나도 모르게 다음 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빠져나올 수 없는 인물들의 매력에 심취하게 되는 드라마. 나도 아직 평양냉면을 먹어본 적은 없으나, 내게 평양냉면은 각별한 시선을 정제된 언어로 담아내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구성진 말맛으로 기억될 것 같다.
친구들과의 수다가 그 어느 때보다 그리운 시대에 살고 있다. 대여섯이 모여 카페에서 그간의 쌓인 이야기들을 털어내고 삶의 지리멸렬함과 지지부진함 따위를 토로하는 일. 인생에 정답은 없으며 그저 오늘이 내 삶의 최선임을 인정하는 결론으로 늘 수렴하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또 한주를, 한 달을 무사히 살아낼 수 있었다는 걸 이제야 실감한다.
팬데믹의 시대,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나 음식과 술을 나누며 밤이 새도록 수다를 떨 수 있을까. 나와 친구와 내 친구의 친구-그냥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을 수 있을까. 요원하기만 한 미래를 꿈꾸며 ‘본격 수다 블록버스터’라는 소개가 덧붙여진 <멜로가 체질>을 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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